학습의 비애
추위를 참지 못해 도서관에 왔다. 2015년 이맘때에도 정말 추웠다. 아는 따뜻한 장소는 법대 휴게실과 도서관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는 장소가 추가될 줄 알았는데 지금도 갈 곳은 마땅치 않다. 확실히 따뜻한 장소로 더 알게 된 것은 멀찍이 떨어진 자연대 건물의 카페뿐이다. 추울 때 몸이 굳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가슴에 박힌 전극물질 때문이다. 머리에 있는 것은 노력을 다해 많이 제거했으나 가슴에 든 것을 녹이기란 쉽지 않다.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 이란 익숙할 형용사를 되새겨본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롱패딩을 입기 시작한 것이 한국의 객관적인 기온이 확 떨어졌기 때문일까? 오늘 나는 유니클로U의 녹색 패딩을 입었는데, 이층 버스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큰 덩치의 살집 있는 어느 남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추위란 개인의 몸상태, 대사와 순환에 달려 있음을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 터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즘의 나는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니라 추위에 취약한 순환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 같은 장애는 병원의 진단으론 알 수 없다. 전문가라 불리는 고인 물의 실체에 관해 생각한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진리의 씨앗으로부터 양분을 빼앗아왔는가. 가장 무능하고 멍청한 사람들이 과거의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신과 맺어왔던 관계의 문 바로 앞에 서서 문은 없다고, 인간은 멍청하고 처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논리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말하고 듣는 언어가 수식에 비해 결코 정보값이 적은 지식이 아닌데도 훨씬 습득하기 쉬운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촘스키는 인간에게는 언어를 관장하는 중추가 선천적으로 있어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모어를 자연스레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비슷한 생각 아래, 아주 오래 전의 어느 서양 사람은 '신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볕도 들지 않는 골방 안에 홀로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아이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학습의 정체에 대한 생각이 나를 두렵게 한다. 해방된 인간, 몸에 전극물질을 지니지 않은 인간은 야생인일까? 전기 자극 없이 인간이 외부세계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추상적인 지식의 수준에까지 이른다면? 요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예전 사람들보다 글을 쓰는 데 능숙하지 않으며 그건 세상을 살아가고 자신을 표현하는 데 글의 중요성이 그만큼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는 태생적으로 수식을 가장 다루기 쉬운 언어로 생각하며 인간의 언어를 그들에게 학습시키는 데는 많은 편법이 필요했다. 코딩을 중학교 때부터, 혹은 더 어릴 때부터(요즘 어린이를 위한 과학 교구에는 코딩 관련 내용이 포함된다고 한다.) 배우는 미래 세대들은 소위 이과적 지식이란 것을 희귀하고 그만큼 더 어려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통계학과 경제학을 배우면서 드는 생각은 데이터를 수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정보들이 소거되며 같지 않은 것들이 같게 취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전에 그렇게 말했다. 통계란 경향성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유명한 고언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하나는 그냥 거짓말. 또 하나는 새빨간 거짓말. 마지막은 통계. 나는 사회주의자로서 어떤 지식이 값진 것이 되는지는 대개 자본의 필요와 영향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했다. 한편 경제학에서는 흔히 수요공급의 법칙을 고금의 진리로 생각한다. 그에 따르자면 '문과' 졸업생이 인기가 없는 것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학생 수를 줄이면 희소성 원리에 따라 문과 졸업생의 몸값이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는 시장에서 어떠한 분야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머릿수에 의해 좌우된다. 그리고 머릿수를 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본의 투여이다. 한국의 경우 자본과 머릿수의 상관관계가 특히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에 원인을 머릿수에서 찾는 이가 적은데, 민주주의의 제1원칙인 '다수의 통치'란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쉬이 마주치게 되는 '자연법칙'이다. 욕망의 운동법칙. 그것은 많은 경우 수동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충분히 많은 정도의 공급에 의해 자극당할 뿐이다. 공급을 줄여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는 없다. 값을 얼마 받을 수 있든 상관 없이 가급적 최대 수확량을 원하는 농부들의 바람처럼, 자본주의적 욕망은 눈 멀어 있다.
게임이 잘 팔리는 것은 많은 사람이 그것을 취미생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0년대 퍼스널 컴퓨터로부터 모바일 환경에의 변화는 일시적으로 앱 개발 서비스 인력의 수요를 급증시켰다. 피해자 모임에서 봤던 목이 조금 들린 여자도 30대 후반에 프로그래밍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개발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언어가 있다면, 세상에는 자신들만이 아는 언어가 있고, 그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투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러한 문화 때문에, 나는 이 분야가 어느 정도까지의 확장성을 갖고 있는지를 당최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프로그래밍을 어디까지 학습한다면 새로운 인공지능의 창안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인공지능을 만드는 데는 타 분야와의 협업이 필요 없는가. 인공지능 관련 학회는 학제적 접근을 관례적으로 과시하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는 그다지 새로운 쟁점이 없다. 새로운 분야를 창출하는 것이 향후 그 분과학문의 전망을 좌우한다. 어렵고 머릿수가 모자란 분과들이 대체로 그 경쟁에서 도태된다. 여기에는 조작적인 개입이 관여하고 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점점 압축적이지 않은 지식에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진리에 근접한 사람들일수록 극심한 방해 때문에 쓰고 싶은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아주 말을 잘한다. 대화의 상대로 인해 필요 수준이 낮아져서가 아니냐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말의 톤과 레벨을 자유롭게 변환하고 이해를 시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인간적' 재능이 아닌가? 글을 쓸 수 없는 것, 혼자 떠들 수가 없는 것을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었다. 소름끼치는 언어의 불완전함 때문에 내가 쓰는 것은 언제나 왜곡되고 또 타인에 의해 오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검열이란 개념에 너무나 쉽게 진다. 힘이 없어지는 것, 그냥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여겨지는 것, 이런 것은 검열과는 관련이 없는 것인데도 나는 그걸 자기검열로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니까 꼭 그걸 문자화해야만 하는 이유를 달리 찾지 못하는 상태. 그러나 이유는 머리를 굴려서 시간을 들여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광처럼 오는 계시에 가깝다. 나는 prophet이라는 말을 그저께 들었다. 나는 입이 되는 의무에 충실해오지는 못했다. 그보다는 주로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존재해왔다. 그러나 더 많이 말을, 반드시 글의 형태로, 내어놓아야만 한다. 대화란 아무리 아름다운 chemistry를 보일지라도 금세 휘발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남서광이 되고 싶다. 불완전한 부서진 언어들을 남겨야 한다. 후에 내가 거기서 슬그머니 나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그것은 '자유롭게' 하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유창하고 그럴싸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