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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싫음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해방감

밀아자 2019. 2. 21. 01:06

근래 세 번의 모임에 참여했는데 가장 기대했었던 한 모임은 위축된 기분에 괜히 실망스러웠고 갑자기 소집된 한 모임은 예상대로 잘 안 되었던 부분과 그래도 진전된 부분이 공존했으며 다른 한 모임은 상당히 저하된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반전되어 술술 나오는 말 때문에 내가 먼저 놀라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러면 마냥 기분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좋긴 좋은데 이상하고 얼떨떨하다는 느낌이 앞서 있다. 이것은 또 누구의 말일까를 생각해보는데, 그럼에도 일단 내가 전부 아는 사실이기는 하고 그걸 조합하는 것도 단 한 사람의 개성에서 나온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오늘은 평소에도 종종 했었던 이러한 생각 때문에 롤랑 바르트의 '작가의 죽음'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나는 프랑스 사상가 중 가장 저평가된 예언가는 롤랑 바르트이며 그에 비해 장 보드리야르는 과대평가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장 보드리야르의 한시적인 예측은 미래학자로서 제레미 리프킨의 예지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 한계가 분명해진다. 한국에 번역된 <소유의 종말>의 원제는 "접속의 시대"였다고 한다. 동생은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당연한 사실이 되어버려서 지금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미래학자들의 보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들은 무엇에 공헌하려 하는가?) 어떤 면에선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롤랑 바르트의 주장이 더 호소력을 얻을 거라는 짐작도 가능하지만 의외로 그런 조짐은 뵈지 않는다. 아까는 내 말에 대한 답으로 작가가 죽었다는 의견이 한 때 대세를 이뤘지만 다시 작가 이론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별 실감이 오지 않았으나 집에 와서 bing에 뜨는 뉴스를 봤다가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이기 때문에 작가라는 존재가 재평가될 수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면 기계가 쓰는 글과 인간(작가)이 쓰는 글은 다르다는 인간성에 대한 선험적인 긍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까 나는 먼저 신경숙의 표절 사례를 이야기했고 '만일 본 적도 없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다른 작가의 글을 한 소절 이상 그대로 베껴 적는 게 가능하다면' 우리는 존경할 만한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격으로 가정된 작가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작가의 작품들을 생애사로 재구성해 그 발전 과정을 되짚는 전기적 비평에 비해 동시대의 몇몇 작품들을 키워드로 묶는 방식의 비평이 재밌지 않을까 하는 문제 제기는 덤이다. 인간을 컴퓨터에 비기는 비유는 좀 더 정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다다이스트들의 자동기술이 실은 누군가 임의로 설정한 인공지능의 글쓰기와 원리적으로 같지 않을까 하는 상상은 재밌다. 문창과는 원래 전기전자공학부의 준말이라는 트위터발 농담은 좀 무섭지만. 

그러니까 나는 바로 앞의 문장을 별달리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쉽사리 갖다 쓰고 잘 맞는 자리에서 떠올렸다고 스스로를 대견해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이런 혼성모방적인 글쓰기에서만 작가의 죽음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인간을 굳게 믿는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이 빈곤했다고 쉽게 탓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반면에 나는 나조차도 쉽게 믿지 못한다. 요즘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 말하는 것이 저마다 따로 노는 것 같다. 그 중 제일은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하는 말이기에 그렇다. 혼자서 되는 대로 내어보는 말은 말이라고도 할 수 없는 broken language이다. 고립된 개인으로서 작가의 발화보다 즉각적인 의사소통에 소비되는 표현들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있음에도 불구 더 강력한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혹은 개인의 발화를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이어갈 수 없게 하는 조건들에 대한 생각들. 좋고 싫음의 파고는 가파를수록 변화무쌍할수록 경계해야만 할 부분이 많아진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보통은 무언가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을 시작하라는 지침이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하다. 오늘은 농협에서 모임통장을 만들었다. 은행 안에서 조합회장이 쓴 책을 발견하고 몇 가지를 떠올렸다. (다른 모 기업 운영자의 저서보다는 바람직해보였다.) 다음주 화요일에 모임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문집에 대해 자평했다. 다음 모임을 토요일로 늦췄다. 집에 오면서 내가 처음 인류학과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했다. 나는 한국인의 의생활을 학술적 담론 차원에서 조망하려고 했고 그것이 산업계에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받아들여져 의류학과나 패션디자인과 등에서 쓰일 수 있기를 바랐다. 어느 때인가 이것을 과한 포부라고 여기며 주눅든 적이 있었는데 어렵기는 하나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해볼 만한 일이다.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정신분석학의 해묵은 성차 이론만 해도 의복이라는 구체적 대상의 전개양상 위에서 분석해보면 얼마나 새로운가. 아나바다에서 시작되는 중고의류 소비의 변화과정도 산업계에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라는 비난을 들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다. 그때라 부를 만한 이전에도 쭉 생각했던 것이지만 SPA의류 상당수는 과거 하위문화를 대표하는 복식을 시즌마다 재탕삼탕하고 있을 따름이다. 반면에 21세기를 상징하는 코드처럼 여겨졌던 딱 붙는 신소재의 미래적 의상은 좀처럼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것. 어쨌든 이런 현상들에 대해 쓰고 연구하는 것은 넓게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의 한 종류일 것이다. 나는 때때로 이야기를 구성하려는 욕망을 느끼고 이것이 작가적 욕망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그게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옛사람들은 즐겨 영감이라는 말을 썼다. 나도 잘 몰랐던 때에나 지금에나 영감이라는 말을 쓴다. 과정이 언제나 일반화된 하나의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은 '기계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시시각각 체험하는 개인적 호불호의 감정 위에서 작업한다. 혹은 그것들을 애써 걷어내가면서 작업된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들을 수 있게 구현해낸다. 여기에는 조금 더 무의식적인 무언가가 관여한다.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낡은 틀 안에서 이름 붙이고 해석하게 두고 싶지는 않다. 이 글은 평소에 비해 상당히 빨리 썼다. 그리고 다음날 이것을 고쳐 공개해두가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