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녹이는 입, 더듬어보는 손 -오퍼센트 <양각의 기술> 전시 비평
구멍, 녹이는 입, 더듬어보는 손
-오퍼센트 <양각의 기술> 리뷰 리단의 전시를 중심으로
“양각의 기술”이라는 전시명이 무색하게도 세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 구멍으로부터 출발한다. 장파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갈비뼈의 구멍에 손을 대어보려는 도마의 일화로부터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이 의미하는 추상적 진리, 절대적 합리성의 세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의문은 곧 끈적거리고 출렁대는 유동적 물질로 재현된 여성의 육체에서 솟아오르는 수많은 구멍들의 연쇄로 이어진다. 듀킴은 항문의 본을 뜸으로써 그 깊고 긴 관의 내부를 드러내고 이로부터 인간 존재를 새롭게 재구성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희적 전복을 시도한다. 화장실의 변기구멍과 변이된 인간의 프로토타입(prototype)인 ‘똥꼬충’은 변기물의 정화의식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며 이때 오염된 것과 순수한 것을 구분하는 속세의 상식은 힘을 잃고 수그러든다. 그리고 리단은 자연물에 존재하는 구멍을 활용하여 작업의 소재를 얻고 정신질환을 가진 작가의 정체성과 그것을 관련지을 방법을 탐구한다.
정신질환자는 여성, 퀴어의 연장선상에 놓인 사회적 소수자로서 적극적인 가시화를 요하는 정체성 정치의 주체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선사하는 몸의 경험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늘 그림자처럼 지고 다닌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속성을 갖는다. 음핑고 나무로 만든 테이블이나 전시의 제목(‘跛行’)을 알리는 문패에 깊게 패인 구멍은 밀어내고 갈고 다듬는 작업의 반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자국이자 나무 본래의 고유한 역사를 의미한다. 이 구멍은 리단 자신이 정신질환의 존재유무를 희미하게 느낄 때까지 목공-노동에 몰두하면서도 번번이 그 자리에 돌아와 있는 병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순간의 실체적 불안을 연상시킨다. 흡사 환공포증(trypophobia)을 불러일으킬 것만 같은, 방크시아 나무 열매 표면에 가득한 구멍들은 군데군데 (리단 본인이 치료를 위해 상시 복용하는) 각양각색의 알약들로 막혀 있지만 그것이 구멍으로 유발된 무의식적 섬뜩함을 진정시킬 수 없음은 당연하다. 시선의 어느 층위에서 이 단절은 오히려 뚫려있어야 할 것을 부자연스럽게 가로막는 폭압적 개입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구멍을 단지 결핍으로만 사고하지 않고 욕망이 발아(發芽)하는 틈새이자 통로로서 긍정적으로 뒤집어보려는 전시의도에 비추어볼 때 관객은 위태롭게 ‘채워지고 있는’ 열매의 형태로부터 새로운 질문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애초에 구멍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구멍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외부의 관여야말로 구멍을 구멍으로, 즉 사회적 관심을 구하는 문제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아닐까?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결핍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긍정적인 정체성 정립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움푹 패인 판’을 뒤집겠다는 실천적 문제의식과 더불어 역설적으로 양각의 기술이라는 제목은 의미를 얻게 된다. 돌출되어 나아가는 욕망-기반의 정체성은 각 작가들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시회라는 무대를 매개로 다른 이들을 소수자로 호명하거나 같은 문제에 연루된 정체성 집단으로 구성해 내는 힘을 가진다. 또한 여성, 퀴어, 정신질환자라는 세 정체성은 외따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꼬리를 물고 때로는 중첩되기도 하면서 세상을 구성하는 지배적 시선 자체에 대한 의심을 공유한다. 종교적 사고에 대한 강한 관심은 세 작가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공통된 코드로서 구원과 안식을 약속하는 영적인 약속을 증거와 믿음이 부딪치며 변증법적으로 도출되는 역동적인 장으로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장파는 “어제까지의 세계” 영상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스러지고 마침내 수면에 비친 그림자만을 남겨둔 채 사라지는 수미산을 보여준다. 수미산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상징적인 공간이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그 잔상뿐이다. 이때 세계의 중심이라는 가정이 오로지 과거에 그것이 존재했다는 증거만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믿을 만한 것이 된다면, 원본과 그림자 혹은 복제품의 위계관계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 전복시키는 언어는 흔히 헤게모니적 표현을 차용하고 다른 의미를 더하며 권력구조의 일상성에 구멍을 낸다. 19세기 남성화가인 쿠르베가 여성의 성기를 ‘세상의 기원’이라 명명했을 때 명시된 여성성은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서 촉발된 것으로서 남성 지배의 시선을 역으로 강화시키는 대타항에 불과하지만, 여성작가인 장파가 그 회화 이미지를 뒤집힌 상으로 복제했을 때 익숙함은 도리어 남성적 지배질서의 노골성을 폭로하고 공격하는 도구가 된다. 마찬가지로 듀킴은 남성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인터넷 은어 ‘똥꼬충’을 원본의 맥락에서 유리시켜 사용함으로써 가시화된 정체성을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폭력이 당연시되는 힘의 구조를 일시적으로나마 해체한다. 듀킴의 작업에서 자주 나타나는 다종교적이고 때때로 샤머니즘적인 모티프는 종교가 세력을 강화해온 역사 속에서 다른 신앙을 억압하고 ‘근거 없는’ 미신으로 치부해온 과정의 모순을 상기시키며 성별과 성적 분열 등 각기 다른 정체성들을 하나로 용해시키는 구멍-항문-의 유토피아적 성격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리단의 경우 나와 생활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인 의사의 직업적 권위에 의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체성으로서 승인을 받는 정신질환의 낙인 자체에 종교적 성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미적 도전의 동기이자 작업의 밑바탕이 된다. 환자는 하느님 앞에 선 죄인이라도 된 양 자신의 문제를 밀실에서 고백하고 각종 검사의 의례를 거쳐 정신의학의 성전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기나긴, 그러나 자주 무의미하게 취급되는 분류 목록에 근거한 진단명을 선사받는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진짜’ 문제였다는 믿음은 개인적 증거-의사가 말한 대로 나 역시 겪으리라-에 의해 강화되지만, 이러한 증거는 원본 없이 물 위에 비친 상처럼 요란한 허구에 가까운 것이다. 병의 실체,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리단은 속수무책으로 목소리를 죽이기보다는 자기 몸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같은 정체성을 지녔다고 여겨지는 동료들을 만나 의미의 집단을 이루는 길을 택했다. 증거는 더 이상 밀실의 개인적 공간 위에 머물지 않고 블로그로, sns로, 비정기 자조(自助)모임이 열리는 Y대학교의 강의실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자전적인 만화와 글을 다양한 방식으로 출판, 발행하면서 리단의 언어는 정신질환자를 사회적 무능력자가 아닌 나름의 통찰력과 미적 취향을 가진 인격으로 재구성해내는 길을 개척해왔다. 이에 더해 이번 전시에서 리단은 과거 몸담았던 목공 경험을 시각미술의 수단으로 호출하고 한국 무속의 풍속을 빌어 영가(靈駕)에게 씌운 옷 위에 자신의 언어를 하나하나 덧입힌다.
무속적 전통에서 환각체험이나 자신이 공동체의 앞날을 예견한다는 ‘망상’은 표면에 드러난 병적인 면모 위로 신령스럽고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힘을 샤먼에게 실어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리단이 무속의 의례물들을 전시장에 가져다놓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증거와 믿음, 호칭과 정체성, 진단명과 경험 사이의 변증법적 경로 위에서 수동적인 위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의 책임을 걸머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무속의례에서 핵심이 되는 무아지경에 도달하는 방편은 익히 알려져 있듯 반복되는 행위를 통한 자아의 승화이다. 리단의 작업에서는 목공과 함께 영가 옷 위에 이전에 (컴퓨터 키보드로) 쓴 글을 붓으로 한 자씩 베껴 쓰는 과정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작가의 정신적 고통을 대변하듯 획과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이따금 번져있기도 한 글자들은 추상적으로만 이해되는 정신질환과 리단의 개성을 잇고 손노동의 지난함이 질환으로 인한 장애와 마찰을 빚는 지점들을 여과 없이 노출한다. 리단의 손이 거쳐 온 궤적 덕에 우리는 상처구멍 위에 손가락을 찔러 넣는 수고 없이도 병의 실체성을 짐작하고, 그것이 전혀 어설픈 구석이 없는 숙련 작업자의 손으로 변모하여 나무를 매끈하게 다듬은 완성품을 내어놓을 때까지 겪었을 심경의 변화까지도 넘겨다볼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말(言)들로 뒤덮인 영가의 형상을 셋이나 불러 세우고, 한영신, 김수영, 이미영이라는 이름까지 부여했건만 전시 공간 “오퍼센트” 안에 주어진 공간 방 한 칸을 온전히 그들에게 내어주기에는 리단에게 하고픈 말이 아직도 너무 많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전시를 관람하다보면 리단이 그간 해온 말들 중 어떤 것을 추려서 내놓아야 더 많은 관객들과 공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숙고한 흔적이 보인다. 작업일지를 가져다놓은 것도 모자라 “주간 리단”의 구절들을 발췌해 인쇄하고 벽면에 붙여놓은 것을 보고 그에게 너의 전시는 첫 전시치고도 너무 말이 많다고 했더니 리단이 해준 말이 있다. 정신질환자의 말은 대변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없는 말이나 다름없게 되리라는 것. 리단이 꾸민 이 특별한 의례의 무대는 12일, 전시가 끝난 후에 한영신, 김수영, 이미영 각자가 방 밖으로 걸어나가 전시 공간 뒤로 이어지는 제단에서 불의 의식을 치를 때까지 끊이지 않는 말의 소용을 구하며 그가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분주한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비록 그것이 정신질환이라는 정체성을 가시화하는 것인지 비가시화하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영역에 머문다 해도 뭐 어떠하랴,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소통하며 스스로 원하는 것을 구한다. 정신질환자 역시 다른 모든 이들처럼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환대받을 자유가 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계의 중심으로 뚫린 구멍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찰나의 기회를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