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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말(Weekend, 1967)-영화로 정치를 이야기하기

밀아자 2021. 5. 17. 01:35

주말(Weekend, 1967)-영화로 정치를 이야기하기

*이 글은 2019년 씨네꼼 문집의 '세 개의 문제작' 기획의 일부입니다.

 올해 5월에 있었던 아트시네마 장 뤽 고다르 특별전에 <중국 여인>(La Chinoise, 1967)을 보러간 저는 지인을 만나 인사하다 엉겁결에 같은 해 제작된 이 영화를 잇달아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는 그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재빨리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 영화의 무엇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그날 하필 컨디션이 좋지 못했기에, 직접 이유를 찾는 씨네필의 숭고한 의무를 저버리고 누군가가 대신 말을 꺼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꼼인들과 함께 한 뒤풀이에서 이 영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반가울 수밖에 없었지요. 철 들 줄 모르는 고다르의 ‘중2병’이나 주말의 ‘B급 영화’적 면모 따위를 들먹이며 힘닿는 데까지 막말을 해댔지만 실은 이런 영화를 주변 반응은 어찌 됐든 옹호하며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데 상당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후 <주말>(Weekend, 1967)을 다시 보고서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많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했고요. 고다르의 수많은 영화들 중 이 영화가 차지하는 위치를 적절히 호명하고픈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주말>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커플의 로드무비이며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혐오를 녹여낸 언어적 용광로이자, 무참히 박살난 자동차(고다르의 성애적 대상으로 유명한), 시뻘건 핏자국, 방화, 절도, 강간, 살인으로 가득한 과격한 콜라주입니다. 이 영화에서 논란거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상영 시간 내내 집중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도무지 한 곳을 향하지 않으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인물들의 대화 혹은 일장연설은 종합되기 어려운 충돌의 연속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의문을 자아낼 만한 것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긴장입니다. 고다르 식으로 말하자면 영화와 현실은 하나입니다. (이모션북스에서 출판한 고다르 인터뷰집 『고다르×고다르』를 참고하세요.) 그렇지만 <주말>의 등장인물들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라는 명제를 몇 번이나 보란 듯이 꺼내놓곤 하죠. 주인공들은 이 영화가 정말 이상하다고 푸념하는가 하면, 영화니까 괜찮다는 말을 변명처럼 덧붙이고, 지나가는 차의 운전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 지금 영화 속에 있는 거요? 현실 속에 있는 거요?”

우습게도 이 막무가내의 요지경 안에서 ‘영화’라는 대답은 곧바로 무시됩니다. 영화가 현실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는 고다르의 생각은 이 영화의 대사들을 결코 쉽사리 넘겨버릴 수 없게 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때로는 설교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주말>의 넘쳐나는 말들은 계급과 인종 문제를 비롯한 현실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저와 <주말>을 함께 보신 분은 음악과 음향효과가 강조되는 것에 비해 말들은 잘 들리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므로, 대사들은 중요하지 않으며 이 영화는 언어의 부정이란 미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견해를 조심스레 제기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고다르 인터뷰집의 내용을 ‘치트 키(짐 자무시 인터뷰집을 읽고 짐 자무시 영화제 소개글을 쓰신 분의 말씀입니다.)’처럼 챙겨두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반대 의견을 내밀 수 있었죠. 고다르만큼이나 언어를 중요한 영화적 재료로서 생각한 감독은 드물며 원어민에게 <주말>의 숨넘어가는 대사들은 다른 사운드와 동격의 청각적 충격을 불러왔을 거라고요. 고다르 영화의 주요한 지향점으로 언급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식의 ‘소격 효과(낯설게 하기)’는 상당 부분 언어에 기대어 있고,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사들은 사건을 진행시키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그 밖에서 침투를 계속하며 관객을 바짝 긴장하게 만듭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결국 허무맹랑할 만큼 끔찍한 교통정체(이 장면의 ‘트래블링 숏’은 주말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일단 건너뛰도록 하겠습니다.)와 고난에 부딪친 부르주아 부부가 소지한 모든 자산을 유실하면서 속물적인 욕망(유산 상속)에 떠밀려 히치하이킹으로 여정을 이어가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게릴라의 포로가 되는 이야기이죠. 문제는 식인을 일삼는 게릴라 무리는 물론이고 부부가 우앵빌(여자의 어머니가 사는 곳)로 향하며 만나는 모든 인물들이 내면이라고는 보여주는 일 없이 실컷 말만 내뱉는 허수아비들이란 건데, 여기서 순식간에 선악을 가려내고 이치를 따져보는 것은 고다르의 정치적 입장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죠. 세간의 상식으로 볼 때 그는 마오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이며 미국의 베트남 전 참전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에 반대합니다. 그런데 <주말>의 초반부에서 부부가 막 고급 자동차에 올라 길을 떠내려는 참에 나타난 이웃집 어린아이는 이들을 방해하고 쌍욕을 퍼부으면서 마지막 악담처럼 크게 외칩니다. “공산주의자!” 하필 이 어린아이는 인디언 분장을 하고 있고요. 영화의 모든 말과 상황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호된 경고인 셈이죠.

<주말>은 분명히 정치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고다르가 그의 영화적 동지인 장 피에르 고랭과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기 전에 찍은 영화중에는 가장 정치적인 영화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러나 그 방식은 모호하고, 선동적이거나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화를 함께 보신 분은 이 영화가 역사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구체적인 예를 몇 개 들 수 있겠죠. ‘계급투쟁’이란 표제 뒤에 출현한 싸움은 부자 애인을 잃은 여자의 격한 욕설 뒤에 여자와 농부가 어깨동무를 하고 퇴장하는 걸로 끝나요. 주인공 부부를 총으로 협박하는 보헤미안 풍의 남자는 동성애자 신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하는 기독교는 언어의 죽음과도 같다고 선언합니다. 나폴레옹 시대의 복식을 한 남자는 양떼와 함께 출현해 불현듯 화면 중앙을 차지해버리죠. 그는 손에 작은 책을 들고 자유는 범죄나 다름없는 폭력이라고 소리칩니다. ‘프랑스 혁명부터 드골 시대의 주말까지’라는 표제는 자유를 향한 대중의 열망이 독재로 귀결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연상시키면서 역사에 대한 회의적 전망을 불러오는 것 같고요. 농담처럼 시작되었던 시비 걸기는 이윽고 꽤 진지한 사회과학적 연설로 이어집니다. 문명 비판 내지는 피식민 주체의 무력 투쟁 지지로 여겨질 법한 이 대목에는 전공자다운 기개가 창연합니다. 어느 평론가 분이 이동진 평론가에 대해 ‘서울대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걸 알리려고 평론을 쓰는 것 같다’고 한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비슷한 말을 고다르에게도 갖다 붙일 수 있지 않을까요. 소르본느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걸 알리려고 했었나보다! (비록 중퇴자라도 말입니다.)

너무 부정적인 어투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저는 언제나 작가의 학문적 배경이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론 고다르는 겸손한 전문가라기보다는 온갖 학문분과에 발을 들이미는 만물상에 가깝죠. 위의 화두들 외에 그는 철학과 예술(음악)을 표상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그것을 특정한 정치적 태도에 연루된 것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에서 연달아 나오는 두 입장, 철학자의 견해와 피아니스트의 견해는 상반된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고다르는 어느 쪽을 지지하고 있는 걸까요?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브레히트를 신봉하는 ‘예술 영화’ 작가로서 고다르의 양가감정과 내적 갈등을 표현한 걸지도 모르죠. 다른 분의 고견이 궁금해지는 지점입니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것은 제가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지향보다는 반제국주의자로서의 정치적 지향을 우위에 놓지 않았나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주말>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을 모르면서 소비에서 구하는 욕망의 표상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는 속물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돈을 가지고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은커녕 고생하는 것만 보고 있으니……혐오감보다는 오히려 애잔함을 느끼게 된단 말이죠. 귀엽기도 하고요.

이런 감상이 감독의 의도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들은 철학자와 대화한 이후 지렁이를 보면서 소크라테스적 깨달음을 얻을 정도의 지각은 갖추고 있습니다. 줄곧 아름다운 여배우의 얼굴로부터 영감을 얻어왔던 고다르이니만큼 미레유 다르크에게 역겨운 역할만을 맡기는 것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을 거예요. 반면 종반부의 ‘하마 이야기’는 하마의 추한 모습을 격양된 어조로 강조하는데, 저는 이게 아무래도 제국주의와 식민화의 은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그저 제가 고다르 인터뷰집을 읽은 후 갖게 된 선험적 지식, 혹여나 선입견의 영향이었을까요? <주말>을 언어적 측면에서 인상 깊게 보지 않으신 분께는 맥 빠지는 질문들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언어로 형상화된 에너지의 격렬한 충돌이었고, 따라서 제 관점을 뻔뻔하게 밀어붙여 이 글을 완성해버렸습니다. 이 뻔뻔함은 아무래도 고다르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