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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제션(Possession, 1981)-장르의 기원으로 거슬러가기

밀아자 2021. 5. 17. 01:42

포제션(Possession, 1981)-장르의 기원으로 거슬러가기

*이 글은 2019년 씨네꼼 문집의 '세 개의 문제작' 기획의 일부입니다.

연인들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다른 것일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을 몇 가지 로 구별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얼마 전 아동성애가 아닌 성인과 미성년자의 순수한 사랑이 가능한가를 논하던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만 있는데, 그건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란 말을 하여 좌중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입니다.) 하지만 신을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 보고 인간에게서도 일종의 신성을 찾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사랑을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로 구분하면서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내리사랑을 모두 아가페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겠죠. 다만 인간의 사랑은 많은 경우 양편에게 일종의 의무, 구속감을 부과합니다. 본능에 맡기는 대로만 해도 지켜나갈 수 있다면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 이도, 사랑을 구실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이도 나타나지 않겠죠.

포제션(possession)이란 말에는 ‘빙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국에도 번역된 미셸 드 세르토의 책 『루됭의 마귀들림(La Possession de Loudun, 1973)』은 17세기의 악마 빙의 사건을 다룹니다. 이 사건은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 뒤에 숨겨진 정치적 음모 측면에서 관심을 끌어왔고 올더스 헉슬리와 켄 러셀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이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창작했습니다만, 마귀에 들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수녀원장 잔 데장주의 공시(公示)된 고통은 단순히 연기라고 보기는 어려운 강력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기억되었을 겁니다. 영화 <포제션>(Possession, 1981)은 바로 이 캐릭터를 지극히 사적으로 여겨지는 부부 간의 관계에서 재현하면서 서로에게, 그들의 아이에게, 가족이라는 제도에 붙들린 남녀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과정을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한데 엮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영화는 누구 말마따나 인간관계를 묘사하는 훌륭한 ‘심리스릴러’ 같기도 하죠.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남편을 대리하는 괴물을 만드는 여자와 아내를 꼭 닮은 여자를 아버지의 위치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남자라니 얼마나 훌륭한 정신분석학적 핑계인지요!

<포제션>의 ‘광기’를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굳이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이혼을 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독의 사생활을 베이스에 놓기에 이 영화는 너무나 많은 장르적 요소를 건드리고 있단 말이죠. 마귀들림, 도플갱어, 괴물, 스파이, 탐정 등등. 장르 팬들의 구미에 맞추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봐요. 종종 ‘아트하우스 호러’로 지목되는 이 영화는 어느 장르에 귀속되기보다는 그 전형들을 놀잇감 삼아 벌이는 난장판 같아요. 갈등은 마귀들림 영화의 전통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괴물을 끌어들여 오컬트와 SF의 접점을 이끌어냅니다. (첫 감상에서 제가 이 영화를 SF적인 무녀의 이야기라고 평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불친절함과 인과적이지 않은 편집에도 불구, 피범벅이 된 문어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들만은 아주 친절하게 이 괴물의 실제성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역시 안나와 괴물이 ‘사랑을 나누는 것’을 남편 마크가 발견하는 장면이겠죠. 포제션의 특수효과 감독은 E.T.와 에일리언을 만든 카를로 람발디이며, 그 탓인지 해당 장면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시선 강탈 의도에 맞먹는 ‘머니샷’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최근에 저는 ‘코즈믹 호러’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한 영화감독은 존 카펜터의 영화에 대해서도 이 말을 꺼내더군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크툴루 신화를 통해 제시한 세계관으로서 거대한 우주적 존재 앞에 맞닥뜨린 무력한 인간의 공포를 다루는 장르라나요. 포제션은 여기에 꽤 잘 들어맞지 않습니까. 하필 두려움의 대상이 두족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말이죠……. 제가 소위 장르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이러한 세계관에서 신의 존재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나요? 놀랍게도 <포제션>은 꿋꿋하게 여러 차례 신을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취향에는 좀 뜬금없어서, 심하게는 겉멋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을 만큼 정직하게 오가는 대사들입니다.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종교를 통해 정당화하거나 성취해오려던 여러 가지 가치들을 부득불 외면해오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이런 대사들의 모호성을 모두 무시하며 뼈만 발라낸답시고 이 영화를 광인들의 심리극으로 요약하거나 통 말이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해버리려는 태도에 저는 반대합니다. 줄랍스키는 자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행여나 이 영화가 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단 것을 놓칠까봐 예수상과 두 손 모은 안나의 모습을 번갈아 담은 숏들을 의미심장한 침묵 속에 마련해두었습니다. 사실 <포제션>의 신성 언급은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도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입니다. 신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기대 내지는 신성 모독을 의미하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거든요. 안나에게는 정말로 (마귀가 아니라) 신이 들어온 것일까요?

안나는 미지의 존재에게 공포를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합일되어 어느 순간 여성괴물과도 같은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오쟁이 진 남편이라는 모티프는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안나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연막에 가깝죠. (물론 하인리히 캐릭터가 주는 코미디적 재미가 이 영화에 독특한 균형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초월적인 힘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는 인간의 안타까운 의지를 관객은 러닝 타임이 꽤 흐른 후에야 겨우 눈치 챌 수 있게 됩니다. 감각이 마비되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이자벨 아자니의 연기는 감정적으로 파워풀한 만큼이나 디테일합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필사적으로 제어하면서도 배배 꼬이는 손의 이상한 움직임을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안나의 시선을 한번 보세요. 영화 초반부터 존재감을 뽐내며 기이하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그 자체로 신들림의 현현입니다. 여기에 잡힌 장벽(이 영화의 배경은 베를린입니다.)은 정말 을씨년스럽고 무법천지의 텅 빈 거리는 냉전기의 암울함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전에 문득 보았던 ‘냉전 편집증’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안나와 마크는 어쩌다 이처럼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이들이 괴물의 눈에 뜨인 데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 걸까요?

저는 남편 마크의 직장을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마크는 누가 봐도 어설픈 스파이에요. 꼭 싸움실력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그가 여러 명의 양복 입은 남자들 앞에서 ‘가족’ 때문에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후 007가방에 든 돈다발을 힘겹게 확인하는 장면에서부터 들통 나는 것이죠. 영화는 마크가 한 일이 뭔지는 알려주지 않고 개 시체를 끌어오거나 핑크 양말을 보여주는 식으로 응당 생겨날 관객의 궁금증에 대처합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감시당하던 실험 대상이었고 정을 붙였던 동물은 병으로 죽지 않았으며 조사하는 측과 조사당하는 측은 본래 한통속이었다는 등 즐거운 음모론의 아이디어들이 흥분되는 음악과 총격질의 박진감에 어우러져 흥겹게 저의 머릿속을 흘러들어갔습니다. 아무래도 <포제션>이 저의 처음 생각과 달리(저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고요.) 관객에게 모든 답을 주는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 마크가 안나 대신 찾아간 유치원에서 안나의 도플갱어를 만나느냐 같은 문제가 마지막 장면에서 서사 내적 정합성을 이룬다는 등의 반전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닌 거겠죠. 저는 여전히 안나가 자기 의지로 괴물을 남편의 형상으로 빚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괴물이 마크의 얼굴로 바뀌는 것은 그의 개별적 인격을 긍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져요. 이를테면 외계인이 손쉬운 잠입을 위해 인간의 형태를 취하는 것 같은 이유죠. “인간은 다 똑같다. 곤충이나 마찬가지다.”로 시작되는 안나의 대사가 그 근거가 되어준다고 생각했었고요. 이에 대한 반론이 또한 아직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