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quarks

문화인류학의 역사/ 인류학의 태동과 사회진화론: 에드워드 타일러, 로이스 모건

밀아자 2014. 3. 10. 18:13

1주차 에세이 (3/10) 인류학의 태동과 사회진화론: 에드워드 타일러, 로이스 모건


모든 학문의 시작점을 대면하는 일은 혼란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껏 받은 교육에 견주어볼 때 비판의 여지가 분명한 편견들이 한때 설득력 있는 학설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상식들 또한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모순되는 견해들까지도 선학자들의 연구 어느 한 부분에서 실마리를 얻어 그것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이다. 가령 공화당원으로서 시장경제를 옹호한 모건의 친족사회 연구는 그가 사회진화의 동력으로 사유재산을 들었다는 것 때문에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근대 서구인들의 자신만만한 어조를 참아 넘기는 것이 괴로울지라도, 그들이 혼신의 힘을 바쳐 내놓은 저술들 어느 한 구석에는 저자들 자신의 생각마저 뛰어 넘는 부분이 존재한다. 아마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고전을 읽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시대가 말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학자인 죄르지 루카치는 발자크의 리얼리즘을 들어 왕당파인 그가 사회의 부패와 혁명의 씨앗을 소상히 기록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시대의 변모를 지켜본 저자는 전 세대로부터 전수된 지식에 구애받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지만, 정직한 기록자라면 어떻게든 그 과정에서 당대의 전반적인 흐름을 글로 후세에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민족지(ethnography)의 경우 인류학자가 현지(fields)와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라는 특성상 다른 학문분야보다 그런 면이 더 도드라질 수 있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므로 언제든 모르는 사실에 부닥치기 마련이다. 수집한 사실들을 귀납적으로 해석할 때는 자신의 논리(많은 경우 기존의 지식체계 안에 놓여있는)에 따라 일관성을 추구할지라도, 그에 다다르는 과정은 역시나 혼란과 내적갈등의 연속인 것이다.

 

인류학의 시작점은 19세기말 진화론의 득세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1860년 이전의 인류학이 생리학과 심리학을 포함하는 인간성 연구였던 반면에 1860년 이후에는 포괄적 의미의 인류 연구를 지칭하게 되었다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는 1859종의 기원의 출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다윈의 생물학적 변종 이론을 적용해 인간의 문화적 차이를 연구하고자 한 학자들은 단선진화론, 보편진화론, 다선진화론, 신다윈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문명의 진화모델을 가정해냈다. 타일러는 그중 균일론(uniformitarianism)을 주장하면서 인종 간의 생물학적 우열을 거부했다는 점 때문에 인류학의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단선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문명이 한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각각의 민족 자체를 차등적인 진화의 산물로 보거나 그 민족성이 문명의 진화를 더디게 하는 장해물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모든 인간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비슷하므로 문명의 발달 과정도 유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바로 이 점이 악명 높은 우생학과 인류학을 구분시킨다. 인류학은 그 초기에 하나의 문명을 모범으로 삼아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이 질타를 과할 만치 내면화한 결과 문화의 다양성을 최우선순위에 두는 학문으로 변신한 것이 오늘날 인류학의 실태라고 할 때, 그 원점을 돌아다보는 일은 지금의 시점에서 오히려 신선하게 여겨진다. 모든 문명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발전의 단계나 관습은 과연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프랑스 구조주의의 기습 이전 타일러와 모건의 학설은 소박하나 직관적인 설득력으로 우리의 주의를 끈다. 타일러는 잔재(survivals)의 개념을 통해 문명의 진화를 증명하고 그 전 단계를 추적해냈다. 꼬리뼈의 흔적이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의 증거를 보여주듯 언어나 의복 등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현재 필요치 않으나 과거의 믿음을 드러내는 관습이 남아있다는 증거들은 몹시 흥미롭다. 다만 그것을 진화라고 부르기 위해 활이 석궁으로 발전하는 것과 같은 직관에만 호소한 것이 그의 한계라고 여겨진다. 한편, 모건은 진화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보다 진지한 현지조사를 시행해 현지조사가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의 인류학에 발전의 계기를 주었다. 그는 이로쿼이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등 일부 문화의 모계율과 유별적 체계(직계친과 방계친의 호칭이 같음)가 해당 사회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을, 적어도 최근까지의 친족집단형태를 알려주는 잔재(타일러의 개념에 따르자면)’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서구와 기타 문화에서의 기술적 체계(직계친과 방계친의 호칭이 다름)를 보다 발전된 것으로 들면서 두 체계의 차이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구분을 나타낸다고까지 주장한 것에는 비약이 많으나, 기술적 체계가 모노가미 혼인의 결과고, 유별적 체계는 친자관계가 명확치 않은 난혼 사회의 관습이란 설명은 조리 있게 들린다. 모건은 이 이론을 더 발전시켜 모노가미 혼인이 일반화된 것은 생계자원 확충이 보장된 상황에서 사유재산 상속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요, 그로부터 친족관계에 기초한 사회질서(societas)와 정치적 유대에 기초한 사회 질서(civitas)가 분리되었음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유물론적 요소가 많긴 하지만 모건은 문명 진화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관념론적인 관점 역시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건의 관점에서 문명의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는 민족들은 자유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개량에 힘쓰지 않는 것인가? 그러니 직접 가서 깨우쳐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박제화해 보존해야 하는 걸까. 인간의 타고난 기질이 비슷하고 문명의 진화 방향 역시 고정되어 있다면 실제 나타나는 문화의 차이는 계몽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한 것일까?

 

고대,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서구 관점에서의 문명 진화 모델을 모든 사회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전형적인 단선진화론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신토와 천황제를 근거로 일본을 '제정일치사회'로 보고 이를 곧 중세에 비기는 것 또한 그 한 예에 속하는 것처럼 들렸다. 종교를 연구한 초기의 서구 인류학자들 역시 제정일치와 주술체계 등 몇 가지 잣대로 미개사회와 문명사회를 구분하고 전자를 계몽하려 들거나 낭만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명의 형태를 몇 가지 잣대에 끼워 맞춰 재단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근대를 반성하는 이로서 충분히 되새겨본 바가 아닌가. 나는 일본에서 천황이 신성시되어 불가침 대상인 것이나 야스쿠니 신사 등의 정치외교문제가 신토와 엮여 있는 것은 알지만 천황과 신토 자체가 문제라고 보는 건 무리수이고 정치계의 개선이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찜찜한 구석이 남았지만 현재의 나로서는 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다른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형태를 공정히 견주는 눈을 키우기 위해 나는 인류학을 공부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각 문화의 특수성에 대해 주의하는 법을 배웠다. 이번 수업에서는 문화 간의 보편성을 추구해온 노력 역시 알아보고 싶다. 그렇게 해야만 무의식중에 하나의 문화(주로 내가 살아온 문화)를 모델 삼는 일 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문화를 비교하는 시선이 가능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