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quarks

문화인류학의 역사/ 문화의 성격: 루스 베네딕트, 에드워드 사피어, 마가릿 미드

밀아자 2014. 3. 24. 01:15

3주차 에세이 (3/24) 문화의 성격: 루스 베네딕트, 에드워드 사피어, 마가릿 미드

 

보아스의 제자들인 베네딕트, 사피어, 미드의 연구들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역사적, 사회적인 구성물로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인간의 심리구조를 각 문화의 성격으로서 비교한 베네딕트와, 소수언어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면서 언어와 인간의식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 한 사피어,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심리 등 인간의 발달단계에 관심을 갖고 성과 육아 등의 주제를 탐구한 미드는 인습 타파에 힘쓴 진보적인 학자들로서 미국 문화인류학 분과에 강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다. 보아스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위대한 학문적 경향, 각 문화가 다르며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은 그의 제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더욱 영향력 있는 입장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눈여겨볼 점은, 이들의 연구가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명백히 실천적인 동기로써 이루어졌거나 적어도 그런 동기를 추동시켰다는 것이다.

 

베네딕트와 미드는 현지조사와 문헌조사 등으로 원시부족을 연구하면서 그들 문화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 결과를 현재 그들이 속한 미국문화를 비판하는 근거로 가져다 썼다. 이는 일정 부분 그들의 생물학적 성별에 기인한다. 당시 미국사회가 여성에게 억압적인 문화를 정당화하고 있었으므로 베네딕트와 미드처럼 주어진 삶의 영역을 벗어나려는 여성들은 갈등을 겪기 마련이었다. 불안정한 위치에서 갖는 자아정체감이 자문화안의 타자로서 주변을 관찰하는 눈을 키운다는 것은 베네딕트의 삶을 기록한 미드의 전기를 비롯해 후대인들이 여성 인류학자의 삶을 지켜볼 때 빈번히 갖게 되는 감상이다. 베네딕트는 주니족, 콰키우틀족, 도부족의 문화를 비교하며 이들 문화에서 정상적인 것이 서구 정신분석학에서는 각각 신경과민, 과대망상증, 편집증으로 진단될 것이라고 보았다. 극단적으로 다른 문화의 양상을 기술하고 이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니체의 원형적 개념으로 명료히 분류한 베네딕트의 연구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을 통제해온 관습의 상대성을 자각하게 해 그 엄격함을 약화시켰다. 여성의 성역할론에 보다 문제의식을 지녔던 미드는 사모아의 십대소녀들에 대한 연구와 아라페시족, 먼더거머족, 챔불리족의 연구를 통해 사춘기라는 시기에 대한 관념, 성별분업과 남녀의 심성이 생물학적 조건에 따른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드의 연구는 그녀가 연구의 목적이 정해진 상태에서 현지조사를 한 결과 자신의 생각에 들어맞는 사례만을 확대 기술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미드의 목적지향성은 그에 걸맞은 파급력을 지녔고, 육아와 가정생활 면면에 적용되면서 베네딕트 이상으로 인류학의 효용과 실천성을 보여주는 선례가 되었다.

 

남성들의 경우는 어떨까. 사피어는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이주해온 유대인이었고, 제자이자 학문적 동료가 된 워프는 22년 간 화재예방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언어학을 연구해온 독학자였다. 이 두 이방인 천재들의 활약상을 베네딕트와 미드의 사례 옆에 가져다 놓는다면 자신의 소수자성을 인식하는 것이 곧 학문적 자산이라고 생각하는 후대 인류학자들의 믿음을 넉넉히 이해할 법도 하다. 일탈자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으로 보았던 베네딕트와 달리, 사피어 스스로는 개인과 집단의 대립보다는 상호의존을 주장했고, 개인의 생각이 곧 사회의 생각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사회 자체에 직접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종적, 성적 편견을 담고 있는 특정 언어를 순화하자는 미국 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주창자들에게 사회 안에서 쓰이는 언어가 곧 그 구성원들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주요한 학문적 근거가 되었다. 언어를 바꿈으로써 사회를 개선할 수 있을 거라는 유토피아적 전망은 신어(newspeak)로서 나타난 조지 오웰식의 디스토피아에 가려졌을지라도,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자신의 말씨를 가다듬는 사적인 도덕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미국인들의 -그리고 그에 영향 받은 서구와 3세계문명인들의- 무의식을 규제하고 있다.

 

이국문화, 특히 원시문화에 대한 관용과 심취, 자문화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지를 과연 엄밀한 의미에서의 문화상대주의로 볼 수 있을까. 이문화를 변화시키겠다는 계몽은 오만하고 편협한 것으로 치부되나 자문화를 변화시키겠다는 계몽의 성찰성은 긍정되는 것이 오늘날 문화상대주의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그렇다면 자문화로 간주할 수 있는 문화집단, 혹은 사회의 테두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문화의 범위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윤리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비판이 자유로운 자문화의 경계는 어떤 집단 안에 속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특권에 달려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흑인이나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동일한 흑인, 혹은 동성애자인 같은 집단의 구성원뿐이다. 선진국의 시민이 개발도상국의 문화를 후진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래도 힐난을 사기 쉬운 일이다. 한편으로,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의 범위는 비교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도 보인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가적 범주가 주어졌을 때 대부분의 한국인은 비빔밥을 자문화로, 스시를 타문화로 생각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한국 내에서 서울시민이 전라도 문화를 자문화로 인식하는 것은 어디까지 타당할까. 90년대에 태어난 어느 개인이라면 지방의 한국전통문화보다 일본문화에 더 큰 흥미와 지식을 보일 가능성도 있다.

 

문화상대주의를 비판한 스피로의 분류에 따라 기술적(descriptive), 규범적(normative), 인식론적(epistemological) 상대주의를 분류한다면, 보아스와 그 제자들의 고전적 상대주의는 기술적 상대주의의 문화결정론을 주장하면서도 규범적 상대주의와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측면에서는 다소 느슨한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규범적 상대주의에는 인지적 상대주의(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문화에 의존한다는 것)와 도덕적 상대주의(가치평가와 윤리적 판단이 문화에 의존한다는 것)가 있다. 인식론적 상대주의에는 일반 문화결정론(보편적인 인류의 심적 동일성 아래 다양한 문화가 가능하다는 입장)과 특수 문화결정론(인간 특성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다. 보아스는 각 문화의 어떤 점을 우수한 것으로, 다른 점을 원시적인 것으로 평가했으며, 문화의 발달단계를 알아볼 수 있는 절대적인 -그러나 다양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베네딕트와 미드는 자문화에 대해서만큼은 규범적 상대주의, 특히 도덕적 상대주의에 따라 기존 규범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대신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자 했다. 진보의 개념을 완전히 걷어낸 상대주의가 하나의 학설로 자리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