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의 역사/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쓰기
9주차 에세이 (5/19) 포스트모더니즘과 문화쓰기
“민족지는 다종교배(多種交拜)된 텍스트 행위다. 민족지는 복수의 장르와 학문 분야를 횡단한다.”(제임스 클리포드·조지 E. 마커스 편, 이기우 역, <문화를 쓴다>, 57쪽.)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author)와 작가(writer)의 구분은 번역어의 모호함 탓에 혼란을 자아낸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는 자동사로서의 글쓰기를, 작가는 타동사로서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또한 저자는 작품(work)을, 작가는 텍스트(text)를 생산한다. 요컨대 저자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자인 반면, 작가는 이리저리 흩어진 텍스트들 사이에서 헤매며 목적에 따라 부분들을 조합해 글을 짜내는 자이다. 텍스트를 직물(織物)에 견주는 은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퍼뜨린 학술적 이미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작가는 특수한 삶의 태도(‘작가주의’라는 말도 있잖은가.)를, 저자는 특정한 책의 생산자(이자 저작권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바르트의 구분에 두 단어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데는 난점이 많다. 이처럼 번역은 완결되지 못한 주고받기이며,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일단의 절충 지점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의 대표 명제는 민족지가 글로 써진 문화의 번역이라는 것이다. 문화를 혼종된 텍스트로 보고, 인류학자의 작업을 문화 간 중개로서 일종의 번역으로 보는 유비는 구조주의가 근간으로 삼았던 언어학을 은연중에 비틀고 있어 아이러니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 간 차이를 연구하는 것은 언어학의 본질이 아니라 주장하며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구조를 밝혀내려 했다. 이러한 야심이 변변찮은 이론적 맞대응도 없이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파묻혀버린 상황은 인류학의 성격이 이론적이라기보다는 해석적이며, 실천적 지향을 갖고 움직여가는 실용학문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포스트모던 인류학의 대표저서인 <문화를 쓴다(문화쓰기)>는 부제에 ‘문학과 정치학’을 명시하며 민족지가 결코 완전한 사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과,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력에 침윤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곧 누구의 입장에서 민족지가 작성되는가, 결과물인 민족지에 글쓴이 자신은 얼마나 드러나 있는가가 인류학 분야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클리퍼드 기어츠가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에서 분석한 바로는, 특유의 글쓰기 스타일을 성취해 ‘문학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민족지들은 인류학자의 내면 기술과 외부 묘사, 조우의 공포와 기타 감정적 반응들이 통찰력에 얽혀있는 복잡한 조각보들이다. ‘팩트’의 검증과, 인류학자의 발언을 대개 믿어주는 느슨한 분위기라는 양자를 비껴나는 새로운 경향, 인류학 저서의 ‘양식’ 자체를 비평하는 것은, 인류학적 시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바탕으로 앞으로 인류학이 추구할 바를 제시했다. 이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인류학이 관찰과 수집 이전에 글쓰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깨달음이라니, ‘안락의자’ 인류학자들에게 붙여졌던 불명예를 떠올려보면 격세지감이다.
클리포드 기어츠는 현대 인류학에 큰 영향을 끼친 학자이며, 문학 전공 후 사회과학으로 갈아타는 도중에 때를 잘 만났다. 그가 활약할 당시 인문학, 특히 문학과 역사학의 방법론을 수용하려는 인류학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인류학에서 처음 ‘쓰기’의 문제를 도입해 포스트모더니즘적 입장의 선구자로 평가된 (앨런 바너드의 입장) 것은 에번스-프리차드이지만, 그는 명철한 글쓰기로 객관적인 인상을 남기며 자아의 표출을 절제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반대되는 지향을 지녔던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제자였기에 그가 더욱 엄격한 자기검열을 수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반면 보아스의 상대주의 영향을 받은 미국 인류학자들은 훨씬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했고, 몇 십 년의 시간이 지나 별다른 반발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류에 포섭되었다. 하기야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상대주의의 논리적 종착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되돌아보면 한 문화의 총체적 기술이 가능하다는 기능주의의 전제는 오만한 착각이며,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온 인류학의 과학주의 전통은 가치 경합의 장을 반영하지 못하는 빈약한 이론에 불과하다. 과학과 예술 사이에서 박쥐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인류학의 곡예는 예측 불가능성 안에서 영역을 좁히고 키우기를 반복하며 양편을 매혹한다. 학제 간 연구가 학술장의 화두가 된 작금의 상황을 인류학은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학문의 오퍼상이 되어 과학과 인문학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 것일까? 질문만을 던져놓는 것이 무책임해보이니 희망적인 이야기를 덧붙이려 한다. 요즘 출판계에선 몇 년째 문학적, 서사적 저서 작성이 가능한 ‘사회과학자’를 발굴하려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사회과학의 문제를 탐구하며 이를 최대한 글로 풀어내려하는 인류학도의 입장에서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인류학의 포스트모더니즘 수용에서 의아한 점은 타 분야, 예컨대 역사학에서와 다르게 연구대상보다는 연구의 방법론과 결과물 쪽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관련 학자들의 책을 충분히 찾아 읽지 못한 탓일 수 있지만, 미시사 연구나 일상성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 사학계 동향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 인류학에서 연구 대상의 변화는 일련의 경향을 이루지는 못하는 것 같다. 유럽 학자들이 (제3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고향을 민족지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탈식민주의의 관점, 성별을 사회 안에서 작동하고 개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페미니즘의 관점 외에 나머지 인류학의 포스트모던한 경향은 자아와 타자의 구분 및 상호작용에 천착해 성찰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 복합적인 ‘글’을 통한 결과의 기술로 요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류학이 모든 문화현상을 연구대상으로 인정하고, 해석학적 성격을 연구의 중점으로 가져간다면, 문학에서 연구 영역을 확장시키며 분화한 ‘문화 연구’와의 실질적인 차이점이 무엇일지가 늘 궁금했다. 학문의 연원이나 선구자들을 위시한 대표 학자들의 차이 외에, 인류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인터넷 서점에서 ‘인류학’을 검색하면 ‘-인류학’이라거나 ‘인류학적 -’라는 식의 표현이 참 많이도 나온다. 전자는 인류학이고, 후자는 타 학문(혹은 유사-학문/담론)인 것인가. 모든 것이 차이로써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바르트의 말이 새삼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