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의 역사/ 초국가주의 인류학
10주차 에세이 (5/26) 초국가주의 인류학
트랜스내셔널리즘은 근래 가장 많은 관심을 모은 학문적 경향 중 하나다. 크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편에 놓인 트랜스내셔널리즘은 근대성의 한 축인 국민국가의 경계를 해체한다. 이러한 도전을 가능케 한 것은 우선 곳곳에서 목격되는 공간 지각의 획기적인 변화들이다. 이동통신수단의 발달로 개인이 일생동안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가 넓어졌으며, 문화는 고정된 한 지역의 범위에 갇히지 않는다. 그간 인류학 학문 분과에서 전제로 삼아온 자아와 타자의 구분 문제를 생각해볼 때, 트랜스내셔널한 관점은 인류학 연구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단일한 문화의 총체성이 아니라, 각 행위자들이 그들의 출신을 넘어 오가며 주고받는 문화의 역동적인 변화 양상을 추적해야만 한다. 어떤 문화도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제3세계’의 주민들은 국경 밖의 먼 지역으로부터 날아든 외래문물과 직간접적으로, 거의 동시간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그런데 ‘세계화’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는 자칫 인류학의 초창기에 있었던 전파주의 관점으로의 복귀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세계화를 곧 ‘미국화’, 혹은 그에 준하는 서구 문화로의 획일화로 보고 우려하는 관점이 바로 그 사례다. 인도 출신의 문화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이러한 관점이 문화의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주와 매체(특히 전자 매체)의 확산으로 지역 문화와 행위(agency)의 가능성은 오히려 증진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대중문화의 소비자들은 자본에 종속되지 않는 능동적인 행위자이며, 문화 소비를 통해 세계를 감각하는 상상력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고삐풀린 현대성>이라는 표현은 얼핏 대중문화의 방종을 경계하는 준엄한 모더니스트의 일갈을 연상시키나, 책의 저자인 아파두라이의 현대성에 대한 관점은 다양성을 향한 낙관적인 전망에 가깝다. 그의 시선 아래서 이주민들이 처해있는 삶의 조건과 경제적 격차, 권력의 편중성은 더 넓은 차원에서의 ‘다양성’과 동일선상에 놓인 것처럼 처리되면서 평평해지고, 비가시화되는 것 같다. 그는 이주가 늘 자발적인 것은 아니며 때로는 반강제적으로, 불가피한 상황 탓에 고향을 떠나는 난민이 생긴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들마저도 이주지의 문화와 출신지의 문화를 동시에 접하며 둘을 중개해나가고 집단을 이루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거나 민족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착취란 어느 한 원인 혹은 거대한 모순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늘 존재하는 집단 정체성의 차이와 지배관계의 재배치, 문화의 주변화라는 과정 속에서 언제든 새롭게 출몰할 수 있는 다층적인 것으로 묘사된다.
전 지구화된 세계 속에서, 지배자의 언어로 지배자를 조롱하는 탈식민주의의 전략은 오랜 시간에 걸친 피식민 관계없이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문화의 소비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 있으므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으나, 적어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일정한 행위를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아파두라이가 말하는 ‘현대성’의 체험이다. 아파두라이는 1950년대와 60년대 신생 독립국에서는 (자신과 같은) 지배계급만이 현대성을 체험했으나, 2000년대에 와서는 노동 계급 출신과 빈민들에게까지 그것이 가능해졌다고 담담히 말하며 장기적으로 “국가라는 형태에 구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국가라는 단일하고 일반적인 현존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문화적인 자유와 지속 가능한 정의가 세계 내에 충분히 발현될 수 있음을 보게 될 것”(<고삐풀린 현대성>, 47쪽.)이라고 전망한다. “무례함과 폭력이 가득한 세계”(47쪽.)란 단기간의 미래일 따름이다. 정말 그럴까?
아파두라이의 현대성 분석은 ‘제3세계’ 주민들의 종속성을 강조하는 서구중심의 관점을 뒤집고, 능동적인 행위자로서 이주민들을 재위치시켰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그 덕분에 제국의 국민/시민이 아닌 우리는 세계화 속에서 민족 문화가 의미를 잃어간다는 멜랑콜리한 감상에 파묻히지 않고도 ‘지금-여기’의 지역성을 일궈나가는 데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불평등과 빈곤을 계급적 대립을 상정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국의 일자리가 없어 화폐 가치가 높은 나라로 이주해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트랜스내셔널한 새로운 문화적 주체인가? 떠들썩한 ‘다문화주의’의 본질은 사실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된 노동 계급의 재배치가 아닌가? ‘탈국가론’이라는 말은 마치 국가를 떠나 살 수 있는 개인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모든 이주자는 국적과 여권으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하지 않은가? 사실 아파두라이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민족지형, 기술지형, 금융지형, 미디어지형, 이념지형이라는 다섯 가지 영역을 나누어 세계화 흐름의 성격과 관계를 파악했다는 아파두라이의 이론 중 <고삐풀린 현대성>의 서문(‘여기 그리고 지금’)에서 본 것은 기술지형과 미디어지형으로 인해 변모하는 민족지형에 대한 전망뿐이었다는 한계를 느꼈다. 금융지형과 이념지형에 대한 그의 입장이 어떠했는지 기회가 될 때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그때에서야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기대가 온전히 드러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