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na

향수와 미망의 ‘모에화’ -일본 서브컬처에서의 우익 논란

밀아자 2016. 12. 28. 06:18

향수와 미망의 모에화’ -일본 서브컬처에서의 우익 논란

 


1. 무엇이 우익콘텐츠인가?-한국에서 일본문화를 제재하는 몇 가지 사유들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는 199810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 이후 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개방되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국민 정서를 이유로 일본 문화가 젊은 층 사이에서 지니는 파급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강했다. 일부 왜색이 짙은 애니메이션은 국적을 짐작할 수 없도록 캐릭터의 외양이나 작품 내용을 수정해 방영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인기를 끈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중에도 벚꽃, 사무라이, 전통의상, 무녀 등 소위 일본적인 것을 반영한 작품이 더러 있다. 일본의 오타쿠(おたく, 御宅)’ 문화 비평으로 유명한 아즈마 히로키는 일본 고유의 것과 무국적인 것을 뒤섞는 하이브리드적인 상상력이야말로 오타쿠 문화의 정수이며, 이런 특징 뒤에는 패전이라는 심리적 외상을 극복하고 외래의 문화적 재료로부터 의사 일본을 재건해내려는 욕망이 숨어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아즈마 히로키 이전 일본에서 오타쿠에 대한 논변 중에 무엇에 깊이 파고들거나 관련 물품들을 수집하는 특성이 에도 시대의 취미 문화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전후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과 전전의 일본 문화 사이에는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이라는 분명한 단절 지점이 존재한다. 만화·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로 국외에 일본을 홍보하는 문화외교(Cultural diplomacy)’야말로 이 사실을 은폐하려는 내셔널리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문화와 정치는 별개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의미망 안에 위치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외래문화를 소비하는 팬들의 탈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이들의 행위를 임의로 의미화하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 속에서 자신의 취향을 고수하는 동시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일본 문화 팬들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한다.

한국에서 오타쿠 계열 작품들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의상을 만들어 입는 코스프레문화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일본 주최사가 정기적인 아마추어 만화 행사인 서울 코믹월드2005년 광복절에 열었기 때문이다. 이 날 기모노나 일본풍의 캐릭터 의상을 입은 채 거리에 나오거나 위령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코스플레이어들이 뉴스에 보도되어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고 전쟁에 동원되었던 역사는 국가 지정 기념일을 통해 거듭 환기되고 국민으로 가정된 사람들의 신체를 규율하는 효과를 나타냈다. 같은 날 행사장 안에서 일본만화를 패러디한 그림, 창작물을 판매하던 동인부스보다 코스플레이어들이 주로 비난받은 것은 자신의 신체를 미디어로 이용하는 코스프레 문화의 특성상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고 취미를 외부에 드러내는 매니아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반-일본 정서는 일본문화를 기반으로 한 동인 문화 전체를 위축시켰다. 2005년은 광복 60주년이자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고 일본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선포하는 등 한일 간 독도 영토 분쟁이 가장 극심한 시기이기도 했다. 논란이 커지자 행사 주최 측은 광복절 행사시에 코스프레를 금지시켰으나 굳이 역사적인 기념일에 행사를 여는 방침에 대한 비판은 여전했다. 특히 남자 캐릭터들 간의 성적인 관계를 묘사한 후죠시(ふじょし, 腐女子: 썩은 여자라는 자조적인 뜻)’ 문화는 이중적인 검열을 내재화하여 외부의 부정적인 시각을 경계하는 음지 문화로서의 성격을 강화해갔다.

십 년이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오타쿠·후죠시 문화는 일본 자본 주최의 행사 외에 특정 작품의 팬들이 직접 대관처를 마련해 단독 행사(온리전)를 개최하는 등 다양화되고 있다. 그런데 올 들어 몇 개의 행사가 항의로 대관이 취소되는 등 난항을 겪어 일본 서브컬처 팬들의 우려를 샀다. 시초는 2016117일 열린 일본 게임 도검난무온리전을 둘러싼 우익 논란이었다. ‘도검난무온리전 주최측은 처음에 세종대 컨벤션 센터를 대관했으나 세종대 측에서 도검난무의 우익 성향을 지적하는 항의 메일을 받았다며 해명을 요구해오자 대관처를 변경했다. 항의를 막기 위해 행사 전날 장소를 공개했으나 바뀐 대관처인 월드컵경기장 측은 성인물 판매를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사를 한 시간 남겨둔 시점에 대관을 취소했다. 결국 사설 호텔 시설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월드컵경기장 측의 대관 취소 역시 우익 시비를 이유로 한 항의전화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 주축이 모 익명게시판이었다는 추측이 나와 해당 게시판에서의 도검난무우익 논란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본 전국시대가 배경인 도검난무는 명검들을 미형 남자 캐릭터로 의인화해 육성하고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웹 기반 플래시 게임으로, 게임 내 설정된 주적(主敵)은 미래에서 과거로 침투해 실제 일어난 역사를 바꾸려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통 역사수정주의자란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 제국군의 학살 행위는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우익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역사수정주의의 의미를 왜곡하고 게임 내에서 태평양전쟁을 막으려는 좌익 세력을 적인 역사수정주의자로 등장시키는 설정은 표면적인 중립 지향과 달리 우익을 지지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캐릭터 중 하나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지한 칼이었다는 점 또한 한국인의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제작진의 우익 성향도 문제가 되었다. 시나리오 작가인 시바무라 유리는 한 콘텐츠사학회에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논란에 대해 본인의 트위터에서 나는 극우라고 밝혀 더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참여 일러스트레이터 중 하나가 과거 가미카제와 학도병을 미화한 일러스트를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이후 시바무라 유리가 사과하자 한국의 도검난무팬들은 시바무라 유리의 발언은 잘못됐지만 도검난무자체는 여러 사람들의 합작품으로 우익적인 성격의 게임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러나 도검난무를 공격하는 사람들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일본 서브컬처 콘텐츠 중 우익을 지목해 금기시하는 행위가 한동안 유행했다. ‘도검난무가 우익 게임인지 여부와 우익이라고 해서 공공시설에서의 행사 개최를 막아도 되는지 여부가 모두 불분명한 문제이므로 오타쿠·후죠시 문화 내에 앞으로 어떤 동인행사든 불시의 항의로 취소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유포되기도 했다.

네티즌들이 우익으로 분류하는 요소로는 전쟁이나 자위대를 미화하는 것, 역사를 왜곡하거나 주변국(한국, 중국 등)을 비하하는 것, 제작진이 우익 발언을 하는 것, 욱일기(旭日旗)가 등장하는 것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많은 작품이 해당되는 항목이 욱일기 등장이다. 욱일기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육군과 해군이 군기로 사용했던 태양 모양의 문양을 말한다. ‘도검난무온리전 대관취소 사건 이후 또 한 번 세종대에서 대관을 취소한 하이큐!’ 온리전의 경우에도 작품에서 욱일기가 등장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빨간색 선이 방사선 모양으로 뻗쳐나가는 문양은 일본에서 명절 등에 흔히 쓰이는 전통 문양이며, 이를 우익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한국의 연예인 패션이나 웹툰 등도 욱일기가 연상되는 연출로 논란을 산 적이 몇 번 있다. 욱일기 논란은 식도락 만화에서 붉은 대게의 다리가 펼쳐진 배경까지 짚어낸다고 할 만큼 강박적인 면모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강박을 조장한 것은 전쟁 잔재에 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나치의 문양인 하겐크로이츠(Hakenkreuz)가 전후 독일에서 엄격히 금지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욱일기를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에서 군기로 재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본래 우익과 관계없는 탐정물인 명탐정 코난등의 작품도 극장판에서 해상자위대를 소재로 한다는 이유로 욱일기가 나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범들로부터 천황을 분리하고 전쟁 책임을 지우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일본의 정통성이 욱일기라는 상징으로 남았고, 한국에서 다소 무분별하게까지 보이는 광범위한 욱일기 색출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작품 내에 욱일기가 출현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비판받는 요소다. 일본에서도 우익 세력이 욱일기를 상징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금기시되지는 않는다. 운동경기 응원에 욱일기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보수 세력이 집회마다 태극기를 휘두르듯, 국가 상징물에 집착하는 것은 우익의 생래적 특성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욱일기로 드러나는 일본 자위대를 지지하는 작품들은 헌법 9조를 개헌하려는 일본 정부의 우경화 움직임과 맞물려 일본 내에서도 심심찮은 비판에 휘말리기도 한다. 아래에서는 그런 사례들을 다루도록 하겠다.

 

 

2. 자위대와 일본 서브컬처의 상부상조

 

일본 자위대는 모병제이며 중학생 시기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다양한 코스로 자위관 후보생을 모집한다. 자위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동원되는 전략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여성화이다. 일반적인 군대는 남성적인 힘을 강조하지만, 정상 군대가 아닌 자위대는 여성을 앞세워 친근한 인상을 도모하는 한편 이를 남성을 유인하는 요인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일본정부는 구 일본군에게서 연상되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 대신 대외 홍보와 봉사활동에 앞장서는 행정조직의 이미지로 자위대를 재편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여성을 자위대 내에 적극 끌어들였다. 여성의 유입은 병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여성 고용 사례로서 국외에 성 평등국가로 평가될 수 있는 지표를 상승시키는 일석이조의 정책으로 각광받았다. 여성이 병력이 되더라도 남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긍정되는 여성상을 유지한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 또한 적극 활용했다. 군복 입은 여성 모델들이 표지로 등장하는 자위대 홍보 잡지 <마모루(MAMOR)>가 대표적이다. 실제 여성이 아닌 일본 만화상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프로모션도 일찍이 80년대부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밀리터리 요소와 미소녀 캐릭터의 조합이 오타쿠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자위대를 모에(, 오타쿠들이 매력을 느끼는 요소로 암암리에 분류된 캐릭터의 외양 또는 성격적 특징)화한 자위관 모집 포스터가 부쩍 늘었다.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 각각을 의인화한 캐릭터를 유포시키는가 하면 자위대와 관련된 애니메이션과의 콜라보레이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자위관 모집은 지방협력본부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포스터들이 존재하며, 모두가 서브컬처 이미지를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공식기관이 자위대를 모에화된 여성 캐릭터로 표현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2014년에 오카야마 지방 협력본부의 자위대 지원율이 2할 증가한 것이 모에 캐릭터의 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서브컬처 이미지를 이용한 일본 자위대 모집 포스터들

 

‘2ch(니찬네루)’ 등 익명사이트에서 활동하던 소위 넷우익들은 강한 일본을 동경하고 애국자로 자처하면서도 자위대 지원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여 빈축을 사곤 한다. 이시하라 신타로, 와타나베 미키 같은 우익 정치인들은 연대감과 소속감 없는 젊은이, 나약한 초식남을 문제 삼으며 징병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베 신조 총리가 기업체 신입사원을 자위대에 일정 기간 파견하는 안 등 사실상의 징병제 도입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자 일본 내 반발은 컸다. 계속되는 인력 부족 상황에서 젊은이를 포섭해야만 하는 자위대에게 밀리터리 미소녀물의 유행은 일종의 돌파구가 되었을 것이다. 가상의 군대나 역사적인 소재를 넘어 현실의 자위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나타났고 이 중 최근에 제작되어 눈에 띄는 사례가 20157월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게이트 - 자위대. 그의 땅에서, 이처럼 싸우며(이하 게이트)’이다. 해당 애니메이션은 자위관 출신의 야나이 타쿠미가 라이트노벨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자위대를 직접 묘사하고 있어 문구만 바꾼 공식 포스터가 자위관 모집 포스터로 활용되었다. 카피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작품은 빼도 박도 못할 우익 애니메이션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 내에 이()세계로 향하는 문이 생겨 그곳을 일본 영토로 간주하고 자위대를 파견한다는 설정과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풍의 이세계에서 자위대가 승승장구하고 평화의 사도로 행세한다는 국뽕(감정을 자극하는 내셔널리즘 프로파간다를 뜻하는 한국 인터넷 신조어)’ 애니라는 점이 시비에 올랐다. 그러나 60년대 전후 출생한 ‘1세대 오타쿠들이 십대 때 보던 우주전함 야마토’, ‘기동전사 건담등의 SF애니메이션에서와 달리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쟁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세계에도 전쟁과 군대는 존재하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자위대의 상대는 아니다. 일본은 이세계로부터 공격 받은 피해자이며 자위대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자국 영토로 간주된 이세계를 시찰하는 것이다. 얼떨결에 지휘관이 된 주인공은 33살의 오타쿠로, 자위대 소속이지만 일보단 취미라고 주장하는 심드렁한 청년이다. 그런 그가 평소 동경하던 판타지세계에 파견돼 미소녀들과 접촉하는 것이 이 작품에 반영된 주요한 욕망이다.

주인공이 오타쿠로 설정된 애니메이션의 시초격으로 1996년 작인 기동전함 나데시코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동경하던 전투로봇을 타게 된 주인공은 후에 적이 로봇 애니메이션을 강령으로 삼은 일본인 군사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에 동일시하며 삶의 목적을 찾아온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힌다. 반면 게이트에는 우익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 이 만화가 직접적으로 전쟁을 옹호하지 않음에도 우익으로 지목된 것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60년대 출생의 1세대 오타쿠, 70년대 출생의 2세대 오타쿠, 80년대 출생의 3세대 오타쿠를 구분하면서 3세대 오타쿠는 과거와 달리 거대서사나 설정을 요구하지 않고 자유롭게 분해 가능한 캐릭터의 모에 요소에 치중하는 포스트모던한 면모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1세대 오타쿠가 패전의 외상을 만화·애니메이션에 투영했다면, 최근의 오타쿠는 이미 거부된 세계와의 투쟁에 집착하는 스노비즘 대신 데이터베이스화된 모에 요소 각각에 반응하는 동물적인 소비 패턴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탈정치화된 오타쿠야말로 게이트와 같은 애니메이션이 타겟으로 삼는 요즘 젊은이의 전형이다. 이세계로 향하는 자위대원들은 그곳에서 미지의 무엇이 아니라 드래곤고양이 귀 소녀등 익히 알고 있던 서브컬처 상의 이미지를 찾으려 한다. ‘게이트는 현실의 자위대를 유능하게 묘사하면서도 오타쿠들의 머릿속에 선재하는 피상적인 세계와 모에화된 유형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둘의 연결지점을 만든다. 그로써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비판받던 오타쿠의 자아가 활약할 무대가 생기고 오타쿠 개인이 자신을 일본에 동일시할 수 있는 계기가 재출현한다.

자위대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자위대를 연상시키는 전차를 소재로 사용해 자위대로부터 자문을 구하고 각종 협력에 나서는 걸스 앤 판처의 사례도 있다. 2013년도 육상자위대의 후지통합화력연습 광고에 걸즈 앤 판처의 캐릭터가 사용되었고 당일 행사장에는 걸즈 앤 판처관련 판매 부스가 설치되었다. 같은 해 육상자위대 소개 DVD 역시 걸즈 앤 판처와 제휴하여 오리콘 DVD 종합 주간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인기를 끌었다. ‘걸즈 앤 판처관련 행사에 자위대가 탱크를 지원해주거나 밀리터리 박람회에서 걸즈 앤 판처등 만화·애니메이션 부스가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전차가 등장하지만 전쟁이 나오지는 않는 미소녀 학원물이다. 학교가 학원함이라는 거대한 함선 위에 있는 가상의 일본에서 전차도라는 스포츠 경기가 유행한다는 설정을 만들어 각 학교 대표로 출전한 미소녀들의 전차 토너먼트 경기를 극화했다. 여기서 전차도는 다도, 꽂꽂이와 함께 교양 있는 여성의 소양으로 여겨진 기술로, 민간 부문에 유파(流波)가 존재하지만 전국대회는 문부성이 개최한다. 극중 시간대에 관해 전후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전쟁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스포츠일 뿐이라지만 전쟁에 이용되는 병기를 어떻게 민간인이 조종할 수 있는지 같은 현실적인 질문은 전차와 미소녀의 만남을 즐기기 위해 넘어가 주어야만 한다. 올해 한국에서 4DX 극장판이 개봉하기도 한 이 작품은 밀리터리 요소가 등장하는 근래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 비교적 우익 시비에 덜 휘말린 편이다. 주인공 팀 소속의 탱크 국적을 다양하게 하고 국가별 스테레오타입 농담을 하되 발화자를 특정 국가를 모델 삼은 일본 고등학교의 학생으로 설정해 일본이 미화되는 상황을 피했기 때문이다. OVA(Original Video Animation, TV 방송 없이 판매하는 애니메이션 특별편)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모델로 한 치하땅 학원을 등장시켜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함으로써 군국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각종 비현실적인 설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차를 나오게 해야만 했던 사정은 제작진이 마련한 안전장치덕택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쟁이 줄 수 있는 피해를 모두 덮어버린 채 전차로부터 스포츠정신만을 챙기겠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목표는 진정으로 포스트모던하고 탈역사적이다.

 

 

3. 탈역사화하는 일본 서브컬처와 우익적 정신

 

일본 서브컬처가 세계사를 다룰 때 탈역사화하는 경향은 예전부터 익히 지적되어왔다. 최근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요소는 캐릭터의 조형이며 스테레오타입화된 외국의 특성 또한 의상이나 성격과 같은 선상에서 캐릭터에 부여된 모에 요소의 일종으로 취급되곤 한다. 특히 일본 동인 문화에서는 사물이나 추상적인 것을 캐릭터로 의인화해 다루는 놀이가 흔하다. 이때 창작되는 캐릭터는 오타쿠들이 알고 있는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와 모델이 된 대상의 특징을 어느 정도씩 반영하는 가상의 구성물이다. 이러한 놀이 문화의 뿌리를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일본의 애니미즘 사상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외래문화가 일본 서브컬처의 의장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역사 자체에 대한 판단은 멀찍이 물러난다는 점이다. ‘걸즈 앤 판처에서 어느 학교 학생들이 파스타를 좋아한다거나 선배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기를 강요하는 것, 기품을 중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홍차를 마시는 것 등은 캐리커처된 각 국가의 특징들이다. 그 모델이 되는 1-2차 세계대전에는 전범국과 연합군의 대립이 분명하지만 토너먼트 경기로 재편된 걸즈 앤 판처의 세계관에서는 이들이 모두 주인공 팀과 대적하는 상대로 나와 나라 간의 관계성이 소멸한다. 이렇듯 동인 문화는 편의대로 역사를 생략하며 때로는 새로운 관계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2009년 한국에서 논란이 된 헤타리아의 애니메이션화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에 유학중인 23세 남자가 블로그에 연재한 웹코믹이었던 헤타리아는 덜떨어진 이탈리아 군을 주인공으로 삼아 독일, 일본, 미국 등 의인화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코믹하게 그려냈다. 모두 남성으로 묘사된 캐릭터들의 대화는 남-남 커플을 창작하는 후죠시들의 관습을 따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극중 등장하는 한국 캐릭터가 일본을 따라하면서도 싫어하는 척 하고, 태극기를 들고 다니며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다든가 다른 캐릭터의 가슴을 만지려드는 변태로 묘사되어 한국인의 항의를 부른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자국을 침탈자 아닌 귀여운 캐릭터로 표현하고 타국 간의 역사를 마음대로 대상화한 것 또한 피식민 경험을 지닌 나라의 국민에게는 불편하게 비쳤다. ‘헤타리아는 통일된 서사 없이 에피소드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구성하는 재료인 캐릭터들 간의 관계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이에 대입시키며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점검하는 데서 이 작품을 보는 독자들은 재미를 얻는다. 그러나 국민의 역사의식에서 합의점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 사실과 허구의 모호한 구분지점은 역사왜곡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쟁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자위대의 권한을 확대하는 등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는 주변국의 우려를 사고 있다. 자위대가 모에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해당 사안의 심각성을 희석하고 호감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인 현상이다. 일본 서브컬처의 탈역사화 경향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게는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다. 작품에서 현실적인 정치적 대립구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동일시의 대상만 남기 때문이다.

도검난무와 같은 제작사에서 만들었으며 먼저 공개되어 도검난무와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공유하고 있는 게임 함대 컬렉션의 경우 일본 서브컬처의 탈역사화 및 모에화가 역사왜곡을 유발하는 지점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게이머가 제독이 되어 일본 전함들을 의인화한 캐릭터들을 조종하는 이 게임의 배경은 태평양전쟁이며 적은 연합군측 함선들이다. 다양한 모에 요소를 포함한 아군 캐릭터가 즉각적인 호감을 주는 반면 연합군측 함선들의 외모는 흉측해 게이머는 자연스레 일본 해군에게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 게임 역시 앞서 사례로 든 애니메이션들처럼 제작 과정에서 해상자위대의 자문을 받았다. 패전 후 군대를 해산하고 창립한 육상자위대, 항공자위대와 달리 해상자위대에는 제국군 해군 출신들이 개입했기 때문에 가장 우익 성향이 강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야마토가 일본 서브컬처에서 갖는 위상을 생각하면 전함은 일본 우익에게 각별한 상징물인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우익 발언으로 한국 내 팬덤이 완전히 뒤집힌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여주인공의 이름 또한 일본군 함선에서 따온 것이었다. ‘진격의 거인은 가상의 세계에서 거인의 습격을 막기 위해 벽을 쌓고 살아가는 인류와 거인에 맞서는 조사병단의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물이기 때문에 한국에 소개된 초기에는 우익으로 지목되지 않았다. 그러나 작가가 비밀 트위터 계정에 나치와 달리 일본은 조선인의 수명을 늘리고 번영하게 해줬으므로 조선인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남긴 것이 드러나 많은 한국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극 중 한 캐릭터가 일본 전범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역사 왜곡과 식민 지배 미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한 탓에 작품의 팬들도 우익 판정을 받아들이고 예정된 동인 행사를 모두 취소했다. 극 내용 전체를 우익적 관점에서 쓰인 것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사실 힘이 없기 때문에 당했다거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벽 안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축의 평화라는 대사들, 거인에게 엄마를 잃은 주인공의 거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결심 등은 고전적인 일본 영웅 애니메이션의 우익적 성격을 빼닮았다. 이런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인류 멸망의 위기에 대적하는 전사로 선택받았거나, 자신을 선택한다. 어려움 속에서 힘을 길러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위에 있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뜻을 지키고 인류에 이바지하겠다는 태도다. 이러한 관점은 오타쿠를 겨냥한 모에 캐릭터들이 대변하는 탈역사성과는 반대로 강한 역사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의 심상은 역사왜곡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쉬이 정치적인 것으로 의미화되지 않는다. 어떤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을 우익이라 지적할 때 한국의 네티즌들은 주로 구체적인 정치적 사실과 상징물에 집중한다. 이 때 우익이란 한국에서 우파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지표와는 비교되지 않는 국지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다. 한국의 우익 배척 운동이란 다시 말해 일본이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켰으며 식민지화한 한국을 착취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각성의 요구다. 의도적으로 탈정치적 색채를 입힌 일본의 서브컬처가 자주 우익으로 지목되는 이유 뒤에는 당사자성의 망각이 우경화로 이어지는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자연스런 우려가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우익을 전통적인 지배세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상으로서의 우익을 쓴 마쓰모토 겐이치는 근대화시기 일본의 지배층은 리버럴이었으며 우익은 오히려 저항세력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리버럴이 전쟁 중 필요에 따라 좌익보다 우익의 정치적 지향을 모방했으므로 전후 일본의 지배세력이 우익 성향을 띠게 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에도 시대 말기 메이지유신을 일으켰으나 정한론(征韓論)’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키고 죽은 사이고 다카모리야말로 우익적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아름답게 죽는 것이야말로 우익 사상의 요체이다. 할복이나 단번에 지는 벚꽃 등 전통적인 일본적 미로 칭해지는 것들에는 대개 우익적인 미의식이 깃들어 있는데, 이것들은 아즈마 히로키가 오타쿠의 동물화에 대비되는 스노비즘의 전형으로 든 것들이기도 하다. 일본의 우익이 넷우익의 애국심을 근본 없는 것으로 폄하하는 이유로 우익의 미의식을 생각해볼 만하다. 넷우익은 타국을 비방하는 데만 앞장설 뿐 국가를 위해 싸우지도 않고 책임감도 부족하다는 식으로 비판받고 있다. 원색적인 비난을 주로 하는 인터넷 문화라면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우익 작품을 몰아세우는 네티즌들은 작품을 수용하는 팬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특정 작품을 배제하는 데만 급급해 생산적인 논의를 막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왜 한국 네티즌의 우익 비판은 강제적인 검열의 뉘앙스를 띠는 것일까? 역사상 손꼽히는 우익 정부로 이름 높은 아베 내각은 혐한 분위기를 방조하고 2015년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을 도입하는 한편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일본은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내용)를 개정해 일본을 정상국가화하려는 의도를 내비친다. 이에 불매운동에 익숙한 한국 네티즌이 일본 우익 콘텐츠 배제를 일본 우경화에 대항하는 소비자운동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콘텐츠와 정부를 동일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일본에 직접 타격을 주지도 못한다. 한국 인터넷에서의 우익 색출은 일본인에게 직접 항의를 한다기보다는 한국 내 내셔널리즘에 기대어 내부자의 애국심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면이 크다.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은 역사에 대한 국민 내 합의점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이는 문화적 자산이지만 자유로운 문화 수용과 창작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아즈마 히로키, 이은미 역,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마쓰모토 겐이치, 요시카와 나기 역,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문학과지성사, 2009.

고모리 요이치 외, 김경원 역, 전쟁국가의 부활, 책담, 2016.

 

김효진 2009, '귀여운' 역사는 가능한가? :헤타리아를 통해 본 초국가시대의 일본오타쿠문화, 일본학연구28:185-208.

이헬렌, 2010, 전함 야마토의 유령들 : 전함, 대중문화 그리고 대중기억의 형성, 일본비평2:204-223.

사토 후미카, 유병완, 2014, 여성과 자위대: 카무플라주하는 여성의 역할과 젠더 주류화, 일본비평11:82-109.

배덕현, 2014, 가상공간에서의 선택된 과거의 자연화과정, 대한지리학회 학술대회논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