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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밀아자 2017. 8. 27. 01:36

며칠 내내 배고픈 감각을 곱씹고 있다. 집에는 특별히 먹을 것이 없고 조리를 하기엔 힘이 없다. 이틀 연속 볶음진짬뽕을 먹고 염분을 보충했다. 덕분에 더이상 짠것을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볶음진짬뽕 봉지라면 품귀현상은 나만 느끼는 것인지 인터넷에는 멀쩡히 매물이 올라와 있다. 대신 산 컵라면은 면이 흐물거려 실망스러웠다. 짠것 다음에는 단것일까? 특별히 맛이 끌리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단맛은 생산성과 직결된다는 기분을 준다. 오면서 생산적인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으로 쿠키를 사먹었다. 시시콜콜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저번주에는 꽤 성실한 기분도 누렸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몸 곳곳이 아프고 가슴이 눌려 호흡곤란으로 잠드는 일이 잦았다. 화요일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붕 뜬 스케줄을 붙잡고 일곱시 반의 영화를 보았으나 기대와 달리 납득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얀 슈반크마예르는 고등학생 때의 '존잘님'이었지만 (이 표현은 문자로 옮기려니 매우 시대착오적으로 우습다.) 시각적 효과 외에 내용 측면에선 퍽 투박한 것 같다. 그날 본 <오테사넥>은 부천영화제에서 상영하기에 걸맞아보이는 B급영화의 월드시네마 버전이었다. 그러나 자막은 전주영화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고전 중 처음에 본 <살아남은 삶>은 특히 지루했다. 프로이트를 제대로 곱씹지도, 놀리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경의를 보내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외에 시각적 효과에 능하지만 극화에 서툰 감독으로는 길예르모 델 토로가 있다. 그의 최근작 <크림슨 피크>는 캐스팅이 아까울 정도로 연기의 설득력을 뽑아내지 못한 졸작이었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팬들도 많이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편안하지만 특별할 것은 없는 일이다. 며칠 만에 다시 아트시네마에 갔다. 어제는 <장미의 행렬>을, 오늘은 <붉은 대기>를 봤다. 두 영화의 감독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는 어제 영화 후의 강연에서 들은 것이다. <붉은 대기>의 감독인 크리스 마르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모든 작품에 천연덕스럽게 고양이(추가적으로 올빼미)를 우겨넣는 점이 매력포인트라 할 수 있다. <붉은 대기>의 영제는 A Grin without a Cat 이었는데 한국어 번역제는 꽤 심심하게 되었다. 혁명의 열기를 다룬 영화이기에 그렇게 정했겠지만 원제 없이는 아무래도 대미를 장식하는 '고양이 숭배 행렬' 장면이 뜬금없이 요란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화자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며 고양이 숭배 행사 영상을 붙였는지 경위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의 경우 머리를 긁는 일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더구나 자리가 없어서 맨앞에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역사문제연구소라는 곳에서 단체 행사 겸으로 대관을 한 것이라 관계자 관객이 많았다. 영화 상영 전에 잠시 크리스 마르케의 북한 사진집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저고리를 치마 안으로 넣어 입은 사진이 신경쓰였다. 생활한복을 일본의 하카마와 닮았다고 공격한 기사에서 치마 안에 저고리를 넣어 입은 모양을 주로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투쟁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인 일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게 필요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것에 너무 괘념치말라는 뜻이었다. 비슷한 뉘앙스가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 반복되었다. 영화는 60년대 혁명의 주된 화두들을 담담하게 다루며 많은 인터뷰 영상들을 삽입한다. 특히 쿠바를 필두로 한 남미의 게릴라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당과 반목했지만 자신들의 이념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의 입에서 나오는 스페인어(추정)는 매우 낭만적인 억양을 띠었고 혁명에 적합하게 들렸다. viva라는 말의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이 가능할까? 그 말은 마치 60년대 좌파의 세계시민주의를 대표하는 문구 같았다. 그러나 역시 60년대를 다룬 마츠모토 토시오의 영화 <장미의 행렬>에서 게바라와 비틀즈를 흉내내는 일본 청년들은 극도로 내셔널한 인물들로 보였다. 그들의 퇴폐적인 생활습관, 하위문화 그룹의 일탈적 행태는 보는 재미에도 불구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는 무리지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하늘에서 포착한 것이 있다. 강연에서 말하기로 그것은 당시 유행하던 행위예술에 가담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상황과 진부한 대사들이 교차되는 와중에 그 순간의 정적은 잠시나마 편안했고 한편으론 의구심을 주었다. 그 장면의 구도는 크리스 마르케가 <아름다운 5월>에서 보여준 것을 빼닮아있다.

영화 후에 아는 사람이 하는 연극을 보러 망원동에 갔다. 예전에 몇 번 온 건물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생소했다. 연극은 슬랩스틱 코미디로 시작해 진부한 예술론으로 이어졌고 평범한 수다회를 아무 변형없이 재현하다가 유명희곡의 주인공을 인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변화는 없다는 메시지가 정말 전달하고 싶은 바였을까? 역사적 혹은 사회적 사건의 당사자를 자신의 작품에 데려올 때 어떤 효과를 얻게 되는지, 그것에 특별히 부과되어야 할 책임은 없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연극을 볼 당시에는 찝찝함만 남았고 사람을 엮는 일에 대한 모종의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대체로 나의 모습(look)에 만족하지만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나로부터 멀어져있다는 답답함을 떨어내지 못한다. 글을 제대로 쓴다는 것이야말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인데, 현재의 나는 지나치리만큼 시간에 묶여있다. 내가 오가는 장소들은 더이상 어떤 현실감도 주지 못한다. 시간을 배열하는 기준은 당시에 나눴던 생각과 대화들로 대체되었다. 나는 더이상 미적인 효과를 추구하지 않으며, 그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맞추어놓기를 원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맴돌고 있고 그 중에 정말 좋은 것이 얼마나 될지를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잃은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새롭게 발견해내고자 노력한다.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외의 작은 욕심들을 자꾸만 뒤로 감추려 한다. 신경쓰지 않는다면 더 좋을 것들이 많다. 주제를 가지고 일관성 있는 글을 쓴다면 과거의 나로 돌아온 기분을 얼마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문장들은 물론 푸념이며 좌절감의 표출일 뿐이다. 나는 나중에 이 글을 처음부터 쭉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글을 손보고 갈 길이 멀다는 데 푹 한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