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차 에세이 (4/7) 문화의 기능과 사회의 구조: 마르셀 모스,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 브라운, 에드문드 리치
사회학이 학제 학문으로 자리 잡았을 때 철학 등의 인문학과 구별되기 위해 강조한 것이 ‘과학성’이었다. 학제 학문으로서 인류학의 성립 과정을 이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보아스,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 등 인류학의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는 학자들의 상당수가 첫 학문적 경력을 자연과학 분야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류학은 사회학에 비해 진화론에게서 받은 영향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동일선상에 놓기란 어렵겠지만, 많은 인류학자들이 진로를 변경하면서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인류학에 직접 적용하려 들었다는 점은 생각해봄직하다. 철학 분야에서 수학한 사회학자들이 철학적 관점으로 사회를 분석하려 들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는 학문적 영역을 규정하려 애썼던 것과는 태도가 꽤 다르지 않은가. 이유로 생각할 만한 것은 많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시작한 ‘과학주의’(현재에도 학문 간 ‘통섭’을 주로 주장하는 측은 인문사회학문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재단하려 드는 자연과학자들이다.)의 도도한 흐름이라든가, 의심과 성찰의 학문인 인문학과 발견과 확신의 학문인 자연과학의 본질적 차이라든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 집단 사이에서 전승되는 문화라는 연구 대상의 명백한 분리라든가. 그러나 이 모든 추측을 보류하고도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인류학은 그 시작부터 통합 학문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서 인류학의 태동기를 설명하며 자연과학의 영향력을 강조했지만, 인류학에 인문학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뒤르켐과 그의 조카 모스가 경제, 종교, 인간성 등 다방면에 걸쳐 행한 사회구조 연구는 그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성격 덕에 현재까지도 인류학 연구의 기본 틀로 회자되고 있다. 사회학자로서의 대우가 압도적인 뒤르켐에 비해 모스는 인류학의 레퍼런스로 보다 환영받았는데, 부분적으로는 그가 사회현상을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경험적인 기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 자신은 한 번도 현지조사에 직접 나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신 그는 뒤르켐 사후 그를 계승하면서 젊은 학자들 사이의 학파를 구성했고 협업을 통해 『사회학연보(Année sociologique)』 등의 많은 책을 저술, 편집했다. 모스가 그의 주저인 『증여론』을 쓰면서 활용한 주요 자료 중에는 영국 사회인류학의 창시자격인 말리노프스키의 것도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민족지학자와 ‘안락의자’ 인류학자 사이의 구분을 없애고 직접 현지조사 자료를 수집하는 인류학자로서 영국 사회 인류학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트로브리안드 언어를 익혀 장기간 작성한 그의 민족지는 세심한 주의력과 풍부한 결로 현지조사의 모범을 이뤄 후대의 격찬을 받고 있다. 모스 역시도 그 중요성을 알아챘고,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 이뤄지는 쿨라(kula) 교환을 무제한 탕진의 ‘적대적 증여’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포틀래치(potlatch)와 비교하여 자신의 논의를 끌어내는 사례로 썼다.
인접지역 사이에서 환을 그리며 비실용적 물품을 교환하는 풍습은 증여자의 자발적인 호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선물’이 실은 사회 속에서 부과된 복잡한 의무의 표상임을 잘 드러낸다. 모든 선물은 받는 순간 의무가 발생하며 주는 이의 권위를 나타낸다는 설명은 현대사회에 적용해보아도 설득력 있는 통찰이다. 다만, 개인 간의 시장 거래나 선물 교환이 잦아진 현대사회와 달리 원시사회에서 교환은 집단 간의 행위로서만 의미가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증여론』은 주로 경제적인 논의로 취급받았으나, 모스 자신은 교환을 사회적, 종교적, 법적 생활의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총체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사회 안에 ‘포섭된(embedded)’ 과정으로서의 경제를 탐구하고자 했다. 모스는 그 외에도 성과 속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본 주술, 문화 형태에 따른 인간성의 비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학문적 관심을 보였다. 사회의 각 부분을 연결된 것으로 보고 그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 역시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기능주의와 구조기능주의라는 명칭으로 묶이곤 하는 둘이지만 실제 래드클리프-브라운은 그러한 호칭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인간의 일곱 가지 생리적 욕구가 문화를 만들어내는 원초적 요인이며 양자 간 ‘문화적 반응’의 연쇄에 따라 복잡한 문화가 발달한다는 말리노프스키의 일반 이론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가 타문화 자료의 수집과 정리 방법을 세우며 얻은 명성에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다. 그나마 기왕 지속되어 온 진화주의와 전파주의의 대립을 무화시키고 기능주의 관점에서 본 사회를 새롭게 전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래드클리프-브라운 역시 문화의 기능적 통합을 강조했고 문화가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존속된다는 생각을 말리노프스키와 공유했으나, 그는 ‘개인’의 욕구를 내세운 말리노프스키의 이론을 경시했고 보다 일반화된 차원에서 ‘사회 구조’의 필요를 문화의 동력으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고려하면, 모스가 말리노프스키의 민족지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했으나 참된 의미에서 뒤르켐-모스의 계승자는 래드클리프-브라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의 필드(fields)-안다만 제도-에서 말리노프스키만큼의 현지조사를 해내지는 못했으나, 보다 강력한 이론의 수립을 열망했고 그것을 이어나갈 제자들을 거느렸다.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은 괴팍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로서도 자주 비교된다. 영국 사회인류학사를 쓴 애덤 쿠퍼는 장난기 어린 어조로 둘 모두가 병약했다는 전기적 사실을 덧붙이며 심리학적 추론을 유도하는데, 그럼에도 개인을 강조한 사람과 사회구조를 강조한 사람의 성격이 마냥 같을 수는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말리노프스키는 현지조사 시 제도와 관습을 개관하는 통계적 지식, 일상적이고 세밀한 관찰, 원주민들로부터 직접 들은 구전 이야기나 정보라는 세 차원의 자료를 구분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원주민 문화가 급격한 변화에 처해있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민족지 저술에서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유럽인이 점령하기 전의 원주민 사회조직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찰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고 정보제공자들의 이야기에 치중했다. 정보의 다양한 측면을 두루 염두에 두는 사람과 그중 하나를 선별하는 사람의 연구가 달랐음은 당연하다. 스승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아끼지 않은 말리노프스키의 제자들에 비해 래드클리프-브라운에게는 숭배자나 적대자(주로 미국 문화인류학자들) 외에 그를 논하는 사람이 적었다는 점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 모두가 자연과학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둘이 연구의 ‘과학성’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사뭇 달랐다. 말리노프스키는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 것만이 과학성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었다. 기꺼이 원주민들 속에 고립되었던 그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근대 서구인의 이상을 대변한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절대적인 객관성의 학문인 과학에는 ‘주의(-ism)’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발견한 하나의 조개껍데기에서도 ‘사회구조’를 발견하는 사람이었다. 래드클리프-브라운은 각 사물들이 갖고 있는 ‘사회구조’가 모였을 때 ‘구조적 형태’가 드러난다고 했는데, 이런 그의 용어 사용은 많은 이의 혼선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구조주의의 적자인 레비스트로스마저도 ‘사회구조’란 말을 일반적이지 않게 쓰는 데는 의아함을 나타냈을 정도다. 과연 과학적 엄밀함이란 무엇일까? 기능주의적 관점이 깔고 있는 사회 유기체론 역시 과학으로 환원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어느 한 부분을 제거하는 실험으로 특정 기관의 기능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생물학과 달리 사회 어느 한 부분의 기능을 추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개론서를 쓰기도 하며 구조주의적 입장에 보다 가까이 갔던 영국 인류학자 리치는 비주류 지도자로서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주류 입장을 비판했다. 그는 사회구조와 ‘관습’이 개인의 행위를 제한한다는 관점과, 권력관계가 곧 사회구조로 나타난다는 관점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비교문화적인 연구 대신 일반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능주의자로 출발한 학자로서 권력관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례적이다. 리치가 본 사회체계의 중심 동력은 개인이나 사회의 욕구나 필요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재력과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사람들의 경쟁이었다. 이 경쟁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발전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를 기능주의자로 볼 수 있겠지만, 리치는 모든 사회가 늘 불안정한 균형만을 유지하는 ‘잠재적 변동 상황’에 놓여있다는 파격적인 해석을 했다. 그는 개인을 곧바로 문화에 연결시키거나 사회의 통합성을 새삼스레 강조하는 대신, 개인 간 힘의 불균형을 인정함으로써 오랜 기간 설득력을 얻는 데 실패해왔던 말리노프스키와 래드클리프-브라운의 숙원사업, 즉 ‘문화 발달 과정의 일반화’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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