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차 에세이 (4/14) 진화론의 부활과 문화생태학: 레슬리 화이트, 줄리언 스튜어드, 마빈 해리스

 

첫 시간 타일러와 모건의 진화주의 이론을 다루면서 나온 이야기 중 특정 문화의 발전을 진보보다는 적응의 개념으로 보는 게 맞지 않겠냐는 말이 있었다. ()진화주의라는 다소 범박한 명명으로 알려진 화이트의 이론과, 스튜어드, 해리스의 연구가 바로 적응이라는 범주를 써서 문화의 보편 이론을 세우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적응이라는 말의 모호함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학자들은 모두 보아스의 문화적 특수주의에 반대하면서 문화 변동의 지배적인 요인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각기 다른 문화라 해도 유사점이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유사점을 발생시킨 어떤 보편적인 이유를 탐구하려 한 것이 이들 입장의 공통점이다. 1920년대 이후로 미국 인류학의 중심 경향이 된 보아스 학파의 관점은 문화결정론, 문화상대주의, 역사적 특수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문화를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학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말자는 것과, 문화를 특수한 역사적·환경적 맥락에서의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포함한다.

 

화이트는 문화결정론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 문화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으나, 그러한 문화는 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간다고 주장해 보편적인 진화의 방향을 부정한 보아스의 입장과 선을 그었다. 개인도 사회도 아닌 을 문화의 단위로 보았다는 점에서 다시금 진화생물학의 영향을 짐작할 만 한데, 정작 화이트는 문화를 초생물학적(suprabiological)’ 성격을 띠는 것으로 규정했고, 생물학이나 자연과학에 함몰되지 않는 문화학의 영역을 분명히 했다. 화이트의 문화진화론은 문화의 기술적, 사회적, 관념적 차원을 구분하고 그중 기술적 차원을 사회적, 관념적 체계의 성격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특별히 강조했다. 후에 화이트는 감정 또는 태도의 범주를 새롭게 추가하기도 했으나, 이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보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기술이 생존 문제 해결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데 여전히 더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 종의 생존이란 곧 환경에의 적응이고, 충분한 에너지를 확보해 인간의 필요에 맞게 변형시키는 과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 간 차이 역시 에너지 개념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해 열역학을 문화진화의 버팀목이 되는 논거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투철한 이론적 관점은 그가 처음 인류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수행한 푸에블로 인디언 집단의 현지조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의아하게도 여겨진다.

 

스튜어트의 다선진화론과 문화생태학은 화이트의 입장보다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다른 문화들 사이의 유사성을 유사한 환경에 대한 보편적 적응으로 설명하면서도 모든 사회가 유사한 문화 발달단계를 거친다는 단선적 진화 모델은 거부한 것이다. 그는 크로버와 로이 밑에서 북아메리카 인디언 집단들을 연구했는데, ‘다른 문화의 총체적인 기술보다는 특정 문제에 초점을 맞춘 민족지를 선보여 비판을 받았다. 1930년대 미국 인류학계는 문제 지향적 연구를 편견과 선입견이 개입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문화생태학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확고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조사방침으로 간주한 것 또한 당시 미국 인류학계에서 진화주의적 입장의 취약한 입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화유물론적 입장을 보다 강력하게 밀어붙여 영향력을 넓힌 이가 인류학에 대한 대중적 저서로 널리 알려진 해리스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와 브라질에서 현지조사를 하고 인종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종주의의 경제적 기원을 밝혀내는 참신한 연구로 주목받았다. 이전까지 인종주의는 인권의 문제로만 여겨졌기 때문에 차별이 경제적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은 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이어서 힌두교의 암소 숭배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관념과 사상이 이들의 행위를 결정지어온 요인이라는 대중의 생각을 크게 뒤흔들었다.

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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