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강사인 상권과 대학생 지숙은 헤어진 직후이다. 지숙의 친구와 상권의 후배가 뜯어말리는 둘의 연애는 불륜이다. 만남이 종료된 후 남자와 여자가 각각 여행을 간다. 장소가 겹치는 건 순전한 우연이다. 강릉이란 공간은 생소하지만 전도된 시간 축 속에서 반복되면서 만남의 장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된다. 한 장소를 겪는 두 명의 인물들은 모두 ‘눈이 예쁜 여자’와 마주치고, 이후 그녀가 강릉에서 자살을 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무진기행』의 죽은 여자를 연상시키는 이 에피소드는 무진과 마찬가지로 강릉을 삶에 반하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유리시킨다. 두 여행이 ‘목격담’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지숙과 상권의 기억은 자신들의 궤적 안을 영영 맴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전해지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지숙은 강릉 여행을 계기로 연락하던 경찰관을 사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상권은 전화로 경찰에게 제보를 하며 자신의 신상은 극구 숨긴다. 사적으로 말을 한 지숙이 강릉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홀로 울음을 터뜨리는 반면, ‘작업’ 실패의 분을 감춘 채 공적 언어를 사용한 상권은 마침내 춘천에서 교수로 채용된다.
지숙의 대사를 듣고, 여자들 간 여행과 남자들 간 여행의 대비에 주목했을 때 이 영화는 익히 알려진 홍상수 감독의 장기대로 한국 지식인 남성의 속물성을 풍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강원도의 힘>을 선뜻 블랙 코미디로 규정짓기는 꺼림칙하다. 지숙에게 엉켜드는 남자들은 저마다 세상에 좌절하고 갈 곳을 못 찾아 방황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떨어지고, 매달리고, 푸대접당하는 이들에게 감정 이입한다면 아무래도 우울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얘긴가요?” 인사동 화랑 거리,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하는 첫 술자리에서 상권은 소심하게 저항한다. 정작 자신이 후배에게 그런 식의 비합리적인 속설을 진지하게 떠들었던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아내를 두고 지숙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고 하면서도 태연히 다른 여자에게 접근하고, 그마저도 실패하자 나이트에서 여자를 사는 상권의 비루함은 그가 교수직으로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습관화된 기만으로 전환될 준비를 갖춰야겠지만, 아직은 삐거덕대는 구석을 남겨두고 있다.
술자리가 끝난 후 상권은 참지 못하고 지숙에게 연락을 한다. 그러나 상권이 지숙의 집 벽에 남긴 메모는 싹싹 지워져버린 후고, 둘의 재회 역시 모텔 방 안에서 하루 만에 흐지부지된다. 어쩌면 상권은 지숙에게서 “어렴풋하게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무진기행』에서 화자가 하인숙에게 쓰는 편지 중)”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한 마리가 사라진 대야 안의 금붕어를 오래 응시하는 그에게서 우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불분명한 표정을 읽는다. 아직은 가면이 씌워지지 않은 맨얼굴이다.
**2015년 씨네꼼 홍상수영화제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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