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시간>은 ‘화노도’라는 가상의 작은 섬에서 일어난 아동 실종 사건을 다룬다. 유일한 생존자로서 아동심리학자와 면담하는 수린을 찍는 동영상 뒤로 내레이션이 깔리며 현상수배전단이 붙은 거리를 비춘 쇼트가 이어지는 도입부는 스릴러장르의 문법을 빼닮았다. 살인과 실종을 다룬 한국영화들이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화면의 질감은 노랗게 가라앉아 빛바랜 사진처럼 유년기의 향수를 강하게 상기시킨다. 영화의 배경인 섬은 양옥집과 버려진 주택, 숲 같은 시골마을의 풍경이 나오는 근거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90년대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적 착시의 공간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고요한 섬과 그곳에서 빠져 나오고 싶어 하는 미래세대의 꿈이라는 주제는 영화적 분위기에 더할 나위 없이 걸맞다. 전체 러닝타임 중 온전히 아역들에게 할애한 시간이 이렇게 많은 영화는 근래 한국의 장편 상업 영화 중에 드문 사례다.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아이들의 세계에 빠져들도록 갖은 채비를 다 해두었다.
문제는 이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 멜로라는 것이다. 실종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랑의 문제로, 차원 이동의 진기함이 십여 년 간의 고독이라는 실존적 고민으로 전환되는 타이밍은 과히 급작스러워서 온전히 감정이입하기를 주춤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수린은 자신이 믿는 진실을 어른들에게 설득하는 데 그리 공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성민이 멈춘 시간을 빠져나와 혼자 커버린 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수린과 성민만이 공유하던 비밀 암호와 비누조각을 비롯한 추억을 통해 증명되지만, 암호가 적힌 노트는 바닷물에 빠져버리고 둘은 ‘남들이 믿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도망가자’는 낭만적인 결론으로 도약한다. 수린과 성민이 모두 버림받은 아이였다는 것이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성민이 ‘어머니’라 부르는 고아원 원장이 자신이 성민이라 주장하는 남자 앞에서 경계심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며 관객은 더 이상 이전의 성민을 증언해줄 ‘어른’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성민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남겨놓은 비누조각은 형사의 눈에 닿는 순간 직관적으로 아동성애자의 삐뚤어진 예술혼으로 번역되고 그를 용의자로 단정 짓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지문이나 유전자 분석 등의 과학적인 입증 방법은 더 이상 들어설 여지도 없다. 혹 돌아올지도 모르는 성민을 애타게 기다리며 비현실적인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어 할 부모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할 일이다.
이렇듯 영화는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가지고 모호한 연출로 관객을 혼란케 하는 ‘아트하우스 무비’의 관습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녀 주인공인 수린과 성민의 아역이 외로움을 드러내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는 전반부가 차분한 전개로 둘의 캐릭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에 비해, 영화의 후반부 흐름은 날렵하지만 단편적이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애달픔이 스쳐지나가고 공사 현장을 향한 주민들의 분노에 찬 의심이 극에 달하는 중에 때맞춰 용의자가 나타난다. 공권력이 탈주하는 연인을 좇는 가장 극적인 장면에서 또 한 번의 ‘시간 멈추기’로 상황이 일시 정지된다. 형사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만 수린에게 모든 것을 그저 덮어버리기를 권한다. 등장인물과 관객들이 두 눈으로 본 것이 이렇게 조작된 사건 기록으로 남는다면 바른 종결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수린은 오프닝에서 보듯 입장을 번복하고 다시 주장한다. 중학생이 되어 섬을 떠나는 수린이 탄 배 위에 중년이 된 성민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 주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장면의 진실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분증도 없고 용의자로 얼굴이 공개된 성민이 배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제 그는 멈춘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돌아오는 법을 익힌 걸까? 우연히 신비한 힘에 휘말려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는 판타지의 전성기는 세기말이었다. 영화에 묘사된 섬의 모습은 수린과 성민의 이야기에 꽤 그럴싸한 배경이 되어주지만 2010년대라는 시점에는 성민을 아동성애자로 보는 관점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관객이 더 많을 것 같다. 영화가 이런 의심을 외면하지 않고 성민(이라 주장하는 남자)이 뛰어난 창작자였을 가능성에도 좀 더 여지를 남겨주었다면, 혹은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은 ‘비합리적’ 진실을 밝히고자 사투하는 주인공의 노력을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보다 입체적인 서사를 보여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장르의 혼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가벼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오로지 수린의 말에만 의지한 채 외부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심정은 아무래도 개운치가 못하다.
'q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 알지도 못하면서(Like You Know It All, 2008) _홍상수 (0) | 2016.12.19 |
---|---|
강원도의 힘(The Power Of Kangwon Province, 1998) _홍상수 (0) | 2016.12.19 |
최악의 하루(Worst Woman, 2016) _김종관 (0) | 2016.10.16 |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Creepy, 2016) _구로사와 기요시 (0) | 2016.08.22 |
자객 섭은낭(刺客聶隱娘, The Assassin, 2015) _허우 샤오시엔 (0) | 2016.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