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는 예술계 주변 사람들이 나오는 여타 영화들처럼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화두로 꺼내고 있다. 무명 여배우인 은희는 연극 출연을 위해 대사를 연습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면박을 당한다. 그런 은희가 남자친구 현오와의 약속 전 서촌에 갔다가 ‘거짓말’ 하는 것이 직업이라는 소설가 료헤이를 만난다. 료헤이는 자신의 첫 단편소설집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 사장을 만나 출간 기념회에 참석하려던 참이다. 약속 장소인 한옥 갤러리를 찾지 못하는 료헤이에게 은희가 길을 알려주고, 둘은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간단한 영어로 신상을 밝힌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가와 다른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 모두 허구의 세계를 꾸미는 사람들이지만, 관객이 앞으로 보게 되는 것은 은희와 료헤이라는 현실의 인물들이 마주하는 난처하고 찜찜한 상황들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의 포맷을 취하고 있다. ‘하루에 한 장소에서 세 남자를 만나는 주인공 은희의 하루’가 메인 콘셉트인 만큼 은희가 어떤 남자를 고를지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부추긴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같은 기대는 재빠르게 사라진다.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는 신인 탤런트 현오는 시종일관 은희를 무시하고 스타가 될 자신에게 빠져 사는 나르시시스트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운철은 아내와 재결합할 마음을 당당히 드러내면서도 은희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 온오프 모두에서 끈질기게 은희를 쫓아다니는 스토커이다. ‘현남친’과 ‘구남친’이 다 이 모양이니 은희와 로맨스 구도를 형성할 남자는 오늘 처음 본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 하나로 좁혀지고 만다. 이를 위해 영화는 은희와 료헤이가 겪는 곤경들을 교차 편집해 보여주며 각 장면을 최대한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가공하고, 여기서 생기는 공감대로서 둘의 연결을 예비해두고자 한다. 사실상 이 영화의 성패가 걸린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오와 운철의 캐릭터가 주는 현실감이다.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한 남자들이 여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내는 몸짓과 대사들은 작은 과장으로도 쉽게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반면 은희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아니다. 영화 초반 료헤이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은희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잔잔한 음악을 깔고 골목길을 찍은 풀 쇼트들을 연달아 보여준다고 해서 해당 장면이 특별한 감성적 호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희와 료헤이가 짧은 외국어로 이어가는 대화는 말하려던 진심과 말해진 내용 사이의 낙차로 긴장감을 발생시키지만, 영화는 이 효과를 더 확장시키는 대신 마지막에 은희의 입을 빌려 성급히 결말을 지어버린다. 우연히 료헤이와 재회한 은희가 자기는 원래 거짓말을 잘 하는데, 영어로 말을 하려니까 거짓말을 할 수가 없겠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영화 안에서 은희가 한국어로 무심코 내뱉는 반응들은 료헤이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외국어로 대화를 할 때 우리는 한정된 단어 범위 안에서 최소화된 뜻 대신 말하는 사람이 주는 느낌과 인상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렇듯 의사표현이 부족한 상태를 보다 진심에 가까운 것으로 여기는 견해는 영화 초반에 언급한 ‘진정성’의 신화와 맞닿아 있다.
은희는 현오와 운철을 뿌리치고 나서 전에 잘 소화하지 못했던 연극 대사가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료헤이는 은희와 다시 마주치고 처음으로 해피엔딩의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며 자기가 생각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던 배우와 소설가가 각각 자기 나름 ‘최악의 하루’를 보낸 후 깨달음을 얻고 진실에 다가서며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 이야기로 요약 가능하다. 그러나 홍상수가 모국어와 외국어 대화의 낙차를 이용해 이미 거둔 성취를 생각한다면 <최악의 하루>가 취하는 영화적 태도는 기만적인 낙관론으로도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나라에서>와 같은 영화들에서 성적 끌림의 순간에 인물들이 주고받는 외국어는 계급과 인종에 얽힌 한국인의 콤플렉스를 폭로하는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진 무의식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며 적극적인 성적 매력의 보편성을 보여주었다. 이에 견준다면 <최악의 하루> 속 은희의 수동성은 이 캐릭터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게 한다. 마음을 주고 공감하기에 은희는 너무나 텅 빈 인물이다. 그러나 마음 놓고 대상화해서 바라보기에는 은희가 대변하는 피상적인 ‘평범함’이 마음에 걸린다. 뚱한 얼굴과 얼버무리는 웃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변명과 어설픈 애교,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다 때로는 질끈 묶기도 하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캐릭터이다. 주연인 한예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법한 인물을 연기하며 개성을 지우는 데 반해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들은 뜬금없거나 지나친 캐리커처에 가까우므로 무게 중심은 자연히 남성 인물들에게 실리게 된다. 영화를 진행시키는 상황은 모두 그들이 발생시키고, 은희는 그저 이들을 거부하거나 우연에 부딪히기를 거듭할 뿐이다.
대체 왜 은희는 그 지경을 겪고도 집이나 다른 곳에 가지 못하는 것일까? 남산의 언덕은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가지 못하는 미로인가? 이 설정을 십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영화에서 담아낸 풍경은 은희가 쉽게 떠나지 못할 만큼의 마력을 갖췄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일상의 소소한 낭만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꿈의 영화’일 수도 있겠다. <최악의 하루>와 마찬가지로 무명 예술가 여성의 성장과 연애감정을 배회와 방황의 연속으로 그려낸 노아 바움백의 영화 <프란시스 하>에 한 평자는 ‘한국 된장녀들의 꿈의 영화’라는 촌평을 날린 적이 있다. ‘된장녀’란 말이 갖는 부적절한 함의는 접어두고서라도, <프란시스 하>에서 여러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온 끝에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변신한 주인공의 성장에 비해 <최악의 하루>가 다루는 내적 변화의 스케일은 너무나 좁다. 곤경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말은 그 사람이 곤경을 스스로 감수하고 받아들였을 때에만 설득력을 갖는다. 쫓아도 쫓아도 좀비처럼 계속 마주치는 남자들로부터 달아난다고, 그러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오늘 처음 본 남자와 로맨스를 기대한대도 처음의 은희와 나중의 은희가 뭔가 달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소소한 불만들을 적어둔다. 영화의 분위기보다는 독립영화의 관습에 기대고 있는 듯한 핸드헬드와 방만하게 이어지는 카페에서의 대화들(그때마다 수평 각도로 내려다본 찻잔 두 개의 쇼트가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너무 많이 나오는 걷는 장면 등은 이 영화를 왜 90분짜리 장편 영화로 만들었는지에 의문을 갖게 한다. 감독이 주로 한국인의 사회적 편견을 절취한 후 효과음을 덧대어 강조하는 개그프로그램의 문법대로 쉽게 코믹한 상황을 유도하려 한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중년 여성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유발하는 존재인가? 단순히 참석자가 적은 출간 기념회의 참담함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던 것일까. 은희와 현오의 ‘19금 대화’에서는 솔직함보다는 감독의 의도가 먼저 느껴지며 현오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폭발하는 은희의 분노에는 관객을 납득하게 만들려는 연출이 몇 겹은 더 발라져 있다. 료헤이의 팬이라는 미모의 여기자와 ‘잘 해보라’며 등을 떠미는 출판사 사장과의 이별 후, 정작 홀로 남겨진 료헤이의 모습을 처량하게 묘사하는 가벼움도 편히 웃어넘기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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