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살하지 않기 위해 신을 고안해 낸 것이다라는 명제는 1)신의 존재는 인간이 자살하지 않도록 한다, 2)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존재다. 라는 두 가지 전제를 포함한다. 카뮈의 명제에 동의하는지 결정하려면 우선 위의 두 전제가 참이 될 수 있는지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1)의 경우, 신을 믿는 많은 종교의 교리가 자살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신을 믿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으려 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신이 자살을 금지한다는 것만으로는 삶이 살 만한 것인지를 결정하려는 인간의 실존적 고민이 해결될 수 없다. 신의 존재가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답이 되어주어야 신의 존재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자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의 존재가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답을 줄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순종하기를 강요하면서 삶에 충실하도록 권유할 뿐이다. 종교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결국 신이 부여한 사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아가 삶에 살 가치가 있는지를 인간 스스로에게 묻는 실존적 고민은 멀찍이 밀려나고 감히 알 수 없는 문제로 삶에서 미루어진다. 한편으로는 신이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부조리들에 나름의 처방을 내려줄 거라 기대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자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점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면 신이 왜 인간에게 세상을 노력의 대상으로 제시했는지 의문이 남는다.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수렴된다면, 자기 삶에서 판단을 내리고 할 일들을 선택하고 그에 책임을 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삶에 주어진 선택의 가능성이 적은 사회에서만 신의 존재가 인간이 삶을 이어나가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은 전근대사회에서는 타당했을지 몰라도 현대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단 카뮈는 과거형으로 말했고, 비록 인간이 과거 신의 존재로부터 자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그 상태에 계속 안주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여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카뮈는 신과의 합일이라는 초월적 세계로의 도피나 자살이라는 소극적 회피보다 세계 안에서 자신의 운명과 끊임없이 대적하는 반항적 인간이 되는 것이 허무주의의 극복 방법으로서 의미 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2)의 경우 무신론의 입장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것, 따라서 인간이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로의 탐구를 멈추고 실제 세계에 대한 탐구만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무신론자들의 고정 레퍼토리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시대에 따라 신의 모습이나 성질이 바뀌어왔다는 점, 지역과 종교에 따라 신을 모시는 방법이 다르게 나타나며 그것은 현지의 특성에 부응한다는 점, 초자연적(으로 여겨져 온) 현상들을 해석하는 방법이 신 외에도 다양해졌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증명할 수 없고 그 성질이 다양하다는 점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신이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된다. 실제로 신은 하나의 레토릭일 수 있다. 그러나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세계가 조직된 원리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신의 존재에 대한 최후 변론은 대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인간은 신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퍼뜨려왔지만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모자란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세계를 창조 혹은 통제하는 힘은 인간의 이해와 무관하게 늘 존재해왔으며, 그걸 자연법칙이라는 말로 바꿔 불러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말하자면 신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유사하게 자동적으로 세계를 조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모습을 유일하게 가능한 신의 이미지로 믿는 신자들은 이와 같은 생각에 난색을 표할 것이다. 세계의 구조를 분석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과학주의자들 역시 이 같은 타협지점을 마뜩찮게 생각한다. 진화론이 종별 분화를 설명하는 완벽한 모델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속 연구를 하다 보면 이 역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므로, 현대 과학의 미비를 신의 존재를 반증하는 근거로 삼으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신이라는 개념이 왜 그렇게 오래토록 영향력을 발휘해왔는지 생각해보려는 입장이 있다. 만일 신이라는 개념이 유용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에 대해 말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남겨 후대에 전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 점에서 인간에게 필요했을까? 이 질문은 다시 신이 인간의 자살을 막기 위한 고안물이라는 카뮈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카뮈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인간 삶의 허무함은 외부세계가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와중에서 옳지 않은 일들에 마주치며,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않은가 고뇌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다. 신을 상정해온 사회는 각 인간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으며 그에 맞게 사는 것이 신의 뜻에 따라 선을 실행하는 방법이라고 가르쳤다. 인간 삶의 영역이 한정되어 있고 경험의 변화가 적었던 사회에서는 신의 의지가 세계에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알 방법이 부족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의 대리자인 성직자에게 의지했다. 들리는 이야기와 좁은 세계 안에서의 경험으로만 미루어볼 때 삶을 긍정하게 하는 종교의 교리는 대체로 유효했다. 그러나 인간의 탐구심이 늘어남에 따라 교리만으로 세상의 이치를 전부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자연을 관측하는 방법은 수도원에서부터 모색되었고 과학의 혁명적 발전을 견인했으며 국민국가라는 개념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경험 혹은 상상 가능한 세계의 범위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 세계는 부조리로 가득하며, 빨리 변화하는 사회일수록 예전의 가치가 의미를 잃고 사라지는 일도 많다는 것이 종종 발견되었다. 신에게 순종하는 것을 최선으로 삼기에 인간에게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져 있고, 인간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문학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인간이 더 많은 자유를 느낄수록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국 책임은 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일지에는 합의가 부족하다. 세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인과법칙에 따라 굴러가지 않으며 번번이 무분별하고 우연적인 위험으로 빠져들고 그 상황마다 다수결과 약육강식의 법칙에 과하게 의존한다. 아무리 이성을 갈고닦아 합리적 판단을 내놓는다 해도 결정권을 갖고 있는 다수 혹은 권력자를 설득할 수 없다면 지식과 지혜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자유의지와 이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존재로 정립함으로써 신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인간은 절망한다. 신을 믿고 그 의지를 실현시키는 장기판의 말처럼 살아가던 시대에는 미처 인지할 수 없었던 고통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시 종교에 귀의할 것인가? 카뮈는 철학의 지난 시대를 괴팍하기까지 한 한 마디로 정리했다. 보통 인간은 부모로부터 삶을 부여받지 그것을 선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카뮈는 개인과 사회의 불행으로 간주되었던 자살이라는 말을 가져오면서 삶을 선택의 대상으로 재정의한다. 자기파괴적인 충동 혹은 극단적 위치에까지 자신을 밀고 들어가 세상에 주어져 있다고 믿어지는 질서에 저항하고, 담담히 죗값을 치르는 인간은 많은 문학작품의 모델이 되는 원형이 되었다. 우리는 그를 보면서 세계의 질서가 거부하거나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불균등하고 모순에 찬 인간의 고안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신이라면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신은 없다. 자살을 막기 위한 고안물로서 신의 존재는 힘을 잃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아직껏 교리에 따라 자살을 죄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나, 그들도 표면적으로는 생명윤리라는 말을 신 앞에 내세운다. 생명윤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는 부러 설명을 피함으로써 말이다.

 

최근 한국의 높은 자살률을 문제 삼으며 정신건강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 심심찮게 나온다. 관련 기사의 댓글 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살 만하지 않아서 죽는 것인데 정신건강이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안락사의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들과 비슷한 입장에서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정신과의사와 상담사가 아니라 생존을 지속하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게 해주는 돈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먹고 살만한 사람, 나아가 부자의 자살은?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진정 실존적 자살을 선택한 이들이겠지! (물론 부자라면, 굳이 정책적으로 정신건강 대책을 수립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비로 관련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억울함을 풀기 위한 자살,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자살(혹은 테러)의 유형이 빈번하게 발생해왔다. 이러한 자살의 원인으로 정신건강을 지목하고 자살자들을 환자로 규정하는 것은 지배 권력의 음모라 할 만하다. 그들의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고, 그들의 상태가 먼저 대상화되어 불건강하고 사회에 적합지 못한 것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이란 말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정신건강은 전문가로 규정된 타인에 의해 관측되고 분류되며, 엄연히 비과학적인 방식인데도 마치 과학적인 지식인 양 대중에 유통된다. 자살자들이 자신의 일을 결정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의료서비스에 의지해야만 하는 이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신의료서비스는 정말로 자살을 막는 대책이 될 수 있을까? 의사들은 극구 부정하려고 하는 사실이지만,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복용하고 세로토닌 수치가 높아진 상태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자살한다. 그들을 자살할 수 없게 만들었던 많은 실존적 고민들 -가족이나 고통, 남들의 수군거림이나 자신이 남긴 흔적에 대한 걱정 같은 것들- 이 약물의 힘으로 일거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불안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 단호히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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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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