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어느 시대에나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엄밀한 의미로서의 학문이 될 수 있는가? 고대로부터 절대적이고 타당한 진리의 탐구는 철학의 주요한 과제였고, 철학자들은 모든 학문에 앞서는 보편적인 진리의 토대가 철학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근대에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의 모든 측면을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재편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부상했다. 철학적인 이념을 자연과학으로 분할하거나 대체하는 것을 합리성의 척도로 삼는 입장을 자연주의라고 한다. 철학에서 정의하는 이념은 감각과 시간을 넘어 불변하는 타당한 진리로서 모든 이성적 존재자라면 필연적으로 따라야만 할 규범을 말한다. 이념을 객관적 사실로부터 배제하려는 자연주의의 공격은 주로 이념의 선험적 성격, 가치 지향적 성격에 기인한다. 자연주의자들은 경험 이전에 사물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생각, 선과 정의, 미 등 반드시 따라야만 할 이성적 규범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기함을 일으킨다. 자연주의의 입장은 대체로 아래의 스펙트럼의 한 지점에 위치한다.
자연이 이념에 선행한다
↓
이념은 자연과학적(경험적) 방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념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자연주의는 모든 이념을 배제하며, 모든 현상들을 물리법칙에 따르는 가치중립적인 자연의 작용들로 환원한다. 예컨대 심리학주의는 이념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인 논리법칙을 심리적 작용에 내재하는 것으로 본다. 심리적 작용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물학적 토대를 지니므로, 논리법칙은 초시간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연적 사건에 따르는 규칙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법칙이 아니라 관측 가능한 자연의 성질을 객관적 진리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려는 자연주의는 입장 간의 경합을 받아들이는 철학적 담론의 장 안에서 하나의 경향 내지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후설의 논박을 따르자면 자연주의에는 내재적인 모순이 존재한다. 철학 내에서 자연주의가 설득력 있는 입장으로서 저변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아직 객관적 참을 정립하지 못한 ‘형성 중인 학문’으로서 철학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철학적 진리 탐구에서 출발해 일찍이 독립된 학문의 지위를 차지한 수학의 엄밀성은 그에 대비된다. 후설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수학과 자연과학의 객관적 진리를 의심하지 않으리라 말한다. 반면에 철학은 모든 학문 분과와 결합하면서도(혹은 그 정초에 해당하면서도) 세계를 보는 관점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철학의 오랜 역사에도 불구, 이러한 불완전성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자연주의자들은 기존 철학의 직관이라는 방법이 자연과학의 경험적 관찰, 실험적 방법에 비해 주관적이고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댄다. 그러나 그들은 철학에서 말하는 ‘직관’이 사물들의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근원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의식작용을 포함하는 잠정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후설이 ‘이념의 자연화’라는 말로 제기한 자연주의의 모순은 다음과 같다. 자연주의는 이념의 규범성을 배격하지만, 자연주의가 자신의 주장을 참이라 내세우는 것도 논리법칙과 진리라는 이념에 해당한다. 참을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규범적인 것이다. 자연주의가 가치중립을 지향한다는 태도를 취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설파하면서 그것이 더 옳고 인류에게 이롭기에 알려져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다면 가치를 배제한다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자연주의는 이론 차원에서나 그 실천 차원에서나 개념적으로 거짓이다. 최근 세계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는 현대 문명의 수호자들은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부역자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페널티를 부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 과학 및 서구의학의 진보를 대변한다고 여겨지지만 다른 사람의 사상과 권리를 제약하면서 특정한 행동을 강제하려는 가치 지향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다.
자연주의는 객관적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 경험적 관찰과 실험적 방법을 추구하면서 기존의 철학에서 허상 내지는 거짓으로 간주되었던 감각적인 것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관찰과 실험을 철학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귀납과 연역에 해당한다. 자연과학은 지각 가능한 경험적 사실의 반복으로부터 원리를 도출하고, 가설을 검증하고자 상황을 통제해 일관된 경험적 사실이 관측되는지를 검증한다. 그렇다면 경험적 사실들을 비교하는 기준과 어떠한 경향성을 입증 가능한가설로 제기하는 의식의 작용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것들이 모두 자연과학적 토대를 지닌다는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자면 앞서 말한 심리학주의, 즉 모든 것이 뇌의 명령이자 신경의 화학적 작용에 따른 것이라는 신경구성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학습에 따라 변화하는 가소성을 지닌다. 사실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은 선대의 사람들이 정립해놓은 언어에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전달되며, 뇌에 선천적으로 각인되어 있지 않다. 자연과학적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사고, 논리법칙의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자연과학적 방법인 관찰과 실험으로 이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사회심리적 현상을 분석한다는 연구, 그 활용에서는 실제로 논리적 이해가 부족해 실험결과를 비약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장 먼저 부딪히는 한계는 인간의 경험적 지식으로는 변인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변인이 통제되지 않으면 어떤 원인이 해당 결과를 발생시켰는지 단정할 수 없다. 잘 설계된 연구에서라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원인이 새롭게 발견되어 입증된 가설을 무화시킬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주 발생하는 논리적 오류는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과관계임이 거듭된 실험으로 밝혀지더라도 선후관계를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표본 산출의 문제가 있다. 실험은 한정된 집단을 대상으로 행해지기에 실험 대상 집단의 편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대 통계학은 표본 산출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방법을 발전시켜왔으나 시간과 비용이 한정된 소규모 연구, 특히 심리학 연구에서는 특정 학교에서 특정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발표하는 일도 흔하다. 이 결과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가능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험이 처음 어떻게 설계되는지도 생각해볼 만하다. 가설은 어디서 발생하느냐? 연구자의 머릿속에서, 당시 사회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본인의 믿음에 따라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생겨난다. 꿈을 꾸고 형태의 착상을 얻었다는 예술가의 영감 같은 이야기도 있다. 어떤 주장을 검증할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 보는 의식작용에 철학은 직관이란 말을 쓴다. 직관적 능력이 정말 객관적 사실의 탐구에서 불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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