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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rry 2018. 8. 21. 23:03

이제는 다들 플라스틱 컵을 쓴다. 이것을 제목으로 일기를 쓰려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들어간 카페에서는 아직 유리컵을 쓰고 있다. 주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회합 장소로 쓰이는 듯한 이 곳은 꽤 넓고 볕이 잘 들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이천 원이다. (당연히 이 곳의 주력 메뉴는 커피 따위가 아니다.) 플라스틱 컵에 관한 사연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정부 정책으로 카페 내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이 금지되었을 때 모두가 플라스틱 퇴출? 따위의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카페는 쓰던 유리컵을 다 치우고 대신 다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 쓰고 나니 정말 하잘 것이 없다. 이런 의미 없이 떠도는 생각을 쳐 내고 좀 더 집중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내 과제라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플라스틱 컵을 생각한 데에는 나름의 앗 하는 순간이 있었다. 재질 자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용도와 형태가 중요하며 아무리 흔하고 값싼 물질이라도 반드시 일회용으로 가공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들. 어떤 고지식하고 꼼꼼한 공무원이 이런 법안을 발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인상과 달리 아주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유리컵 대신 단단한 플라스틱 컵을 쓴다면 그렇게 무겁지 않고 깨질 염려도 없고 한번에 세척하기 편하고 마침 시급도 올랐으니까... 소비자의 미적 감상만을 제외하면 나쁠 것이 없다. 물론 일회용 플라스틱 컵 제조 업체에게는 악재가 되겠지. 전체 산업계가 입을 타격 따위를 운운하는 걱정은 다행히도 별로 보지 못했다. 실은 일회용 컵은 좀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사례지만서도 소위 경제 규모라는 것의 상당 부분은 역시 쓸데 없는 소비로 지탱되고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과소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고용될 수 없었을 사람들이 대체 몇 명일까. (이 추론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상당 부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내 평소의 지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선택이라는 허울 아래 계속해서 쌓이는 별 필요도 없는 잡다한 물건들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신제품의 필요를 사람들에게 설득시키는 데 모든 사람이 꼭 인생의 대부분을 바쳐야 할까. 물론 나는 편의점에 들어오는 신상 유제품을 별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소비하고 있기도 하다...) 

과소비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부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자신에게 다가올 명백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돈을 순환시킴으로써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가로 얻는 물품들은 그 자체로는 별 게 아니다. 소비한 것으로 다른 가치-예컨대 좋아하는 사람의 만족-를 생산하지 않는다면, 무언가가 변형되지 않는다면, 좁은 집 안에 물건을 쌓아두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지 않을까. 나는 늘 내가 살아가는 데에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이런 안도(혹은 자부심)는 사실 아주 이기적이다. 한편으로 부자의 소비는 이중의 난관에 부딪혀 있다. 안목 있다고 자부하는 부자에게는 많은 물건이 눈에 차지 않는다. 한국 고급품 시장의 위축을 염려하는(동시에 '중국인' 소비자의 입맛에 맞춘 요란스러운 저가 물건들만이 판친다는 적잖이 인종차별적인 견해를 부끄럼 없이 털어놓는) 사람들은 한국인 대중이 '가성비'만 찾기 때문에 부자의 자산을 노동계급에게로 성공적으로 이전시키지 못하고 소비자의 권리가 침해되며 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불평한다. 한편으로 오직 부자들만이 엄청나게 비싼 값에 사치품과 고급 서비스를 누리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이를 SNS 등에 올리는 등의 행위는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지탄을 받고 있다. 근본적으로 많은 국내 생산자들은 독자적인 부가가치를 형성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다. 돈을 챙기는 사업은 늘 다수의 구매력 없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삼성이든 신세계든 형편 없는 저가 의류와 저가 유통 체인을 카피하고 런칭하는 데 그토록 많은 돈(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자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걸로 정작 그들이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기업이라면 당장의 손해에 구애받지 말고 국내 대중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 위워크 같은 수상쩍은 외국 자본이 이런 데 더 기여하고 있다는 것은 좀 요상한 일이다. 자라도 이케아도 처음 시작할 때는 그렇게 다른 부문에서 자본을 축적한 대기업이 아니었다. 물론 돈을 벌어들이는 건 아주 즐거운 일일 수밖에 없다. 자본의 투자로써 중산층은 일하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면서 즐거워하고 자본가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것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 투자가 언제나 고용을 수반한다면 좋을런만,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투자는 대체로 수익성이 신통치가 않다. 부동산과 주식투자 관련 책들은 출판가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뜬하게 종수를 늘려 나간다. 실은 모든 엔터테인먼트는 다 생산적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본래 즐거운 것이다. 거기에 차단 장치를 두어 즐겁지 않게 만든 이들(그들은 인간일 수도 그 이상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을 나는 적으로 간주한다.

생각의 지시에 따르자면 다음에 쓸 말은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글의 흐름상 합당한 귀결이다. 하지만 도통 내키지가 않고 피곤한 기분만 든다. 이런 피로감을 표현하는 대사로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키스 미 데들리>에서 주인공의 비서가 증인을 좇는 탐정의 추리를 가리켜 하는 말이 제격이다. "실은 끈이 되고, 끈은 밧줄이 되고, 당신은 그 밧줄에 목을 걸겠죠!" 술술 잘 되어가는 방향에는 늘 문제가 있고 필요하거나 멋지고 옳은 것에는 늘 방해가 잇따른다. 나는 언제나 노력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인드 컨트롤은 무엇보다 노력할 수 있는 신체의 자유를 빼앗는다. 학생들은 본래 느껴야 할 것 이상으로 쓸데없이 고통받으며 우연히 얻은 성취를 과도히 자신하도록 유도받는다. (타락한 마인드 컨트롤 시스템의 지배 아래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지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이득을 얻고 인류가 똑똑해지길 적극적으로 막는 세력이 없었더라면 있을 리 없는 일이다. 2016년인가 누군가 한국의 문제를 '교육의 부재'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며 현재 한국의 최대 문제는 교육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아차 싶었다. 교육이면 사회 문제가 모두 해결될 거라고 믿는 선량한 중산층의 전형적인 가치관은 일종의 세뇌주의이다. 교육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지와 그에 따른 어떤 보상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들은 함구한다. 쉽게는 재사회화 교육을 통해 보다 쉬운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특정 분야에서 이 과정이 야기할 수 있는 끔찍함을 이미 관찰하기도 했다). 고용이 늘고 있는 분야에 한해 정부는 교육 비용을 대신 지불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능 교육은 사람들이 쉽게 불평하고자 하는 인성 함양 및 가치 판단 기준 확립과는 저만치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런 불만은 늘 (정신)치료의 영역으로 다뤄지는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다. 교육이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미끼인 성취 욕구를 동년배 안에서 몇 퍼센트를 차지하느냐 외의 다른 방법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 한국에서 교육은 늘 계급 재생산 이슈와 결부되어 논의돼 왔고 더이상 계급 재생산과 교육(이라기보단 학벌)이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지자마자 이 시장의 가능성은 논외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리주의적인 발상에 따르자면 부자들이 똑똑해지고 비물질적인 가치에 헌신하고자 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낄수록 자산의 사회적 이동은 부동산 아닌 방법으로 보다 활발해지지 않을까. (이게 잘 되지 않은 건 무엇보다도 한국의 마인드 컨트롤 시스템이 그릇되고 부당한 방식으로 관리되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가담자-가담하는 순간 그들은 이미 피해자가 아니다!-의 반감과 적의를 십분 이해한다.)

외국에는 사교육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천편일률적인 입시 경쟁이 없을 뿐이지 특기 적성에 맞는 사교육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학원 뺑뺑이를 돌고 있을 클로이 킴을 언급하며 한국의 사교육 실태를 비판한 한 외국 언론의 태도는 나를 몹시 비위상하게 했는데 학원을 다니는 게 그렇게 불행한 삶도 아닐 뿐더러-정말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엄마와 하루 종일 보내는 시간이 아동에게 더 즐겁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거짓말이다!- 부모가 스노 보드 선수라든가 하는 특권을 지니지 않은 보통 아이들에게 스노 보드를 배우는 것은 결국 사교육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영재'가 박사 학위 취득에 실패하고 입대한다고 한 기사를 보면서도 생각했는데 특수 교육을 전부 다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일각의 태도는 어이가 없다. 표준적인 교과 과정을 제공하며 국가 지원을 받는 고등 교육 기관이 얼마나 더 개인 사정을 봐줘야 하는가? 그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장애인 교육의 권리 같은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이것은 또 복잡한 이야기이고... 적어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천재라는 신화는 거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은 정말 많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부모의 헌신적인 홈스쿨링으로 탄생한 물리학 머신과 그를 자교 홍보에 활용한 한 인천 소재 대학의 결탁이라니 터무니 없는 일이다. 제발 교육을 부모, 특히 엄마의 노력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한다. (딱히 전문성도 없는) 심리상담이나 정신치료의 전문성을 옹호하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왜 교육의 전문성 확보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는가. (역시 교육학과가 한국에 적어서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교육은 가히 문과 공통의 밥그릇이므로 교육학과를 늘리려는 움직임은 아무래도 일어날 수가 없다...) 사교육에 대한 죄책감과 경계심은 한국인에게 특수한 것이지만 전세계적(특별히 미국적)으로 이는 전문직종이라는 명백히 반시장적인-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주의와 성공적으로 타협하고 있기도 한- 개념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교육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공식적인 계층이동의 한 방편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받은 교육 정도에 따라 노동의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른 임금 격차가 정당하다는 주장은 굉장히 반박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별 반감 없이 유통되고 있다. 어떤 직종의 임금을 상승시키고 그것을 모두가 인정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동기는 수요 증가가 아니라 교육 과정의 독점화이다. 그런데 교육의 소비를 특정 직종의 독점적 자격 보장과 그 요건에 한정시키는 경향은 유독 최근의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류가 후손에 대한 기대를 점차 버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로는 훌륭하고 저렴한 교육 서비스(가령 책 같은)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요즘의 지식 시장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다. 기껏해야 유발 하라리 같은 인간이나 스타가 되고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떠들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내게 엔터테인먼트가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기는 다 자신을 위한 글이다. 전에 나는 이 같은 이유로 자신의 일기에 대한 감상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독자로서 어떤 식의 일기가 재미있고 어떤 일기가 재미없다는 평은 관음증의 고백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위의 내용을 훨씬 재미있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경험담과 내가 만나거나 엿들은 사람들의 사례를 곁들여 적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실은 이런 생각들이 전부 그런 순간들 안에서 새어나오던 것을 잡아챈 것이라서일 터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그 일을 했더라도. 나는 재미있는 대화를 생산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누구라도 원한다면 위의 내용을 포함한 다른 버전의 글이라는 것을 한번 시도라도 해볼 텐데. 사실 원래 쓰려던 내용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한 뮤직비디오와 한 행위예술가와 한 패션모델에 관한 글이었다. 또 하나는 최근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감상이고 그것은 좀 나중으로 미뤄둬야 할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의도치 않는 결과를 낳는 정책들에 관한 것이고 이건 좀 난감한 기분을 준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써야하는(=공적인) 글과 쓰려던 소설이 있다. 원래 첨부했던 뮤직비디오를 치우고 엔터테인먼트라는 말에 끌려 Gang of Four의 해당 이름(그리고 유의미한 느낌표!)을 가진 앨범의 한 곡을 링크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이 밴드가 매우 존재감 있는 커버를 가진 EP를 올해 발매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이반카 트럼프의 사진이었다. 음악은 매우 트렌디했고 나는 몇 번이나 내가 알고 있는 그 밴드의 동일인(들)이 계승한 밴드가 맞는가를 의심했지만 큰 주목을 받고 있진 못해도 맞는 것 같다. 나는 이른바 좌파 밴드의 풍자적 효과를 노린 정치계 인사(특히 그게 여성이라면!) 인용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갱 오브 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튜브 정책이 바뀐 것인지 티스토리 상의 문제인지 링크 첨부가 잘 되지 않았다. (링크 방식을 바꿔서 수정했다!) 이게 안 된다면 앞으로 내 즐거움이 너무 감소할 것 같다. 카페 주인 분께서 이미 15분 전에 영업이 끝난 사실을 온화한 미소로 알려주셔서 카운터에 유리컵을 반납하고 나왔다. 나올 때는 열심히 하고 계신데 죄송하다는 인사까지 받았다. 이것이 건물주의 품격과 여유인가 하는 근거없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어쩌면 건물주들은 저렴한 값에 많은 이들에게 커피와 쾌적한 자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개중에는 학문에 이바지하는 분도 있고. 역시 노동보다는 자본이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러나 노동 없이 자본의 가치라는 게 과연 유지될 수 있으랴... 자본주의는 노동에, 자본주의 하의 노동은 우리가 놓인 처참한 생존 조건에 너무나 의존적이다.

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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