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걸 하나 포기했는데 위기감이 없다. 하루는 굉장히 루즈하게 지나간다. 월요일에 소설 초고 하나를 탈고한 후로 그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지독한 생각의 연쇄는 약 하루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때는 계속 내가 쓴 구절들과 그에 대한 피드백들이 어지럽게 떠돌아서 몹시 피로했다. 남긴 게 완성된 거라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실은 그건 장편소설의 1장에 가까웠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그걸 계속 생각하는 거 자체가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기대도 자책도 두려웠다. 지금은 몸을 가눌 수 없는 고통이 일종의 불안 같은 걸로 변환되어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 컨디션이 전에 비해 묘하게 좋은데 몸의 어떤 부분인가가 따로 노는 느낌. 화요일에 아주 오랜만에 집에 남아 있는 토피소팜을 하나 꺼내먹었다. 토피소팜은 자율신경안정제이다. 나는 주로 도파민 분비 유도제인 로피니롤을 처방받지만 딱 한번 의사한테 신경안정제를 부탁한 일이 있는데 그때 받은 게 토피소팜이다. 외국에서는 이걸 여러 증상에 두루 쓴다고 한다. 내 체감으로는 굉장히 순한 약이다. 먹으면 팽팽한 게 좀 누그러지면서 편안한 느낌이 들고 정신이 노곤해진다. 해서 나는 이걸 잠들기 전에 두어 번 먹어보고는 상비약으로 쓰겠다며 보관해두었었다. 어제와 오늘 아침에는 또 꽤 오랜만에 기면증 같은 잠의 침입을 받았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잠을 아주 불필요한 것으로 그래서 커피를 먹든 피라세탐을 먹든 반드시 무찔러야 할 거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너무 지쳐있고 뇌가 피곤해서 그냥 자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잠이 보약이다, 너는 푹 자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꿈에서 일본으로 추정되는, 알 수 없는 지역으로 여행을 갔다. 허술한 옷감을 두른 원숭이들이 깃발 같은 것을 들고 오는 장면을 봤다. 이윽고 내가 올려다 본 하늘에서 건물 상단부가 무너지듯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는데 그 장면은 두 번 반복되었다. 알고 보니 주변 다른 건물들에 막혀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그 건물은 축 전체가 회전하는 놀이기구의 한 부분이었다. 불황기의 히트상품. 그건 사람들을 놀래켜 줄 수 있는 거라고 들었다. 그보다 좀 더 앞서 가로 세로 절편으로 촘촘히 나눠진 구 모양의 고무 재질 체어를 보기도 했다. 검은색과 노란색/분홍색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그건 공기를 주입하니 순식간에 빵빵해졌다. 누군가가 검은색 구형 체어를 경품으로 받았다. 꿈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색 말고 검은색과 빨간색 버전을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예쁘지도 않은 그것을 왜 사야겠다고 생각까지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깥쪽이 노랗고 안쪽이 분홍색으로 된 것은 나중 기억으로 조금 뇌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가끔 다른 세상에서나 쓸 법한 물건들을 아주 사실적인 영상으로 본다. 기계식 날개가 달려 단거리 비행 이동이 가능한 컨테이너(박쥐 날개 문양이 그려져 있음)라든가 라텍스처럼 매끄럽고 반짝이는 재질로 된 풍선 가방들이 길가 상점에 가득 걸려 있는 모습 등. 표면이 매끄럽고 고무처럼 탄성 있는 물질들은 천연재료를 선호하는 '이쪽' 세상과 다르게 그 곳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재료 같았다. 이윽고 난 거대한 잉어킹을 낚고 있는 피카츄 두 마리가 움직이는 장난감을 보았고 현지인 할머니와 길게 잘린 종이를 컵에 말아 넣는 공예품을 만들었다. 목소리가 파편적으로 들려와 알아챌 수 없었는데 언론들이 이 사안에서 인류학을 어떻게 다룰까 같은 것들이었다. 마지막에 나는 풀어둔 짐들을 챙겨 할머니와 자리를 뜨려 했지만 꽃과 공예품은 다 찌그러져 버렸다.
의무 같은 글쓰기를 다 끝내기 전까지 저번 주에는 Crystal Castles의 음악에 중독되어 지냈다. Ⅱ를 가장 먼저 듣고 2015년에 뒤늦게 Ⅰ에 빠져 엄청나게 들었었는데 최근에야 듣게 된 Ⅲ이 이들의 앨범 중 단연 좋다. 가십으로 넘겼던 Alice Glass의 그룹 탈퇴 및 성범죄 고소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아티스트와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음악이라는 장르? 매체? 의 특성인지는 모르겠다. 6월 22일은 가장 좋아하는 밴드 Gang Gang Dance가 7년 만에 신보를 내는 날이었다. 갱갱댄스 신보를 들어야 하는데도 크리스탈 캐슬즈를 계속 듣고 싶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발매 정보를 확인하고 하루가 지나 신보 Kazuashita를 듣기 위해 애플뮤직을 신청했다. 지불정보를 입력했지만 3개월은 무료라고 한다. 아이폰을 쓰면서 시리를 쓰지 않는 것에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지만 아이폰을 쓰면서 애플뮤직을 쓰지 않는 것은 좀 창피할 만한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처음에는 해외 지불 가능한 카드가 없어서 포기했지만, 마스터카드와 비자카드가 모두 생긴 후에도 한동안 애플뮤직을 신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에 유튜브 애호가로 살았었는데 저작권 침해는 둘째 치고 배터리나 음질 등에서 매우 비효율적이었는데도 관성대로 버텼던 걸 보면 정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유튜브의 인공지능 추천은 애플뮤직의 음악 추천에 비해 훨씬 다채롭고 또 유저의 기호를 세심하게 고려해준다. 애플뮤직 추천이 좋단 말을 몇 번 들었던 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알던 아티스트들 이름을 확인하는 재미는 있되 (레이블이 아닌) 음악 자체를 기준 삼은 분류, 하부 장르에 대한 이해는 몹시 미흡하다 할 수준이다. 팀 쿡을 경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화되었다. 유튜브의 미세 조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크리스탈 캐슬즈에 중독되기 바로 전에 유튜브 추천으로 대학 힙합음악 동아리들이 랩 디스전을 하는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몹시 길티플레저 컨텐츠였다. 오버그라운드로 기어올라온 랩퍼들의 정형화된 자의식보다 훔쳐보기에는 더 재미난 레이어가 많이 깔려 있다고 해야 하나.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좀처럼 글을 쓸 수가 없다. 뭘 하고 싶은지 몰라도 일기를 계속 쓰는 게 좋은 것 같다. 생각보다 건지고 싶은 소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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