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돌아오고 몇 번이나 반복되어 맴돌던 생각이 다 사라졌다. 이건 분명 편안한 기분인데 그동안 여기에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을 모두 잃어버린 듯 해 무엇부터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잊어버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조금 노력하면 대부분 되새겨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생각하던 의식이 이미 내 것이 아니고 저 멀리 떠나간 것 같아 그걸 굳이 다시 써야하는지 그럴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음악을 듣고 있다. Peaking Lights라는 이름의 미국의 사이키델릭 팝 듀오이다. 구글 검색으로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알았다. 2017년에 나온 최근 앨범을 유튜브에서 링크하려고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곡의 이름에 오타가 있어 그만두었다. 이 앨범은 지나칠 만큼 달콤하고 아련하며 가슴을 저미게 하는 구석도 있다. 태연하게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이상한 압박이 들어온다. 생각이 부자연스럽게 멈추고 가슴이 조여오며 문장을 이어나갈 수 없는 것이다. 답답해서 백화유를 눈썹 위에 몇 방울 뿌렸다. 좀 많이 뿌렸던 것 같다. 눈꺼풀에는 전혀 닿지 않게 뿌렸는데도 금방 액체가 아래로 흐르는 느낌이 나더니 눈이 시큰해졌다. 직접 눈에 들어간 것은 전혀 없지만 백화유의 화학성분은 피부 밑에서 굉장히 빨리 퍼진다. 한동안 눈을 감았더니 아예 눈을 뜨기가 어려워졌다. 어쩌면 여기서 눈을 감은 건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세수를 좀 하고 왔다. 잠깐이지만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나 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응급실의 끔찍함이 떠올랐다. 내가 이전에 응급실에 갔던 건 실수였다. 119를 불러 실려간 강화도의 보건소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친절하게도 그들은 내게 신경쇠약 진단을 내려주었다.
화한 감각은 평소 당기던 안면 전반부 위쪽에 고루 퍼졌고 씻어내니 안심이 되었지만 여전히 눈은 쓰라렸다.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눈꺼풀이 떨렸지만 한결 나았다. 괜찮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피해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백화유만한 것이 또 없다는 과거의 생각이 희미하게 스쳤다. 눈을 뜨고 있으니 곧 시야가 안정이 되었고 눈물도 멈췄다. 잠깐 동안의 얼얼함과 좁아진 시야는 공포스러웠지만 다 지나고 나서 꽉 막혀 있던 이마는 훨씬 편안해졌다. 백화유의 주성분은 메칠살리실레이트라는 살리실산의 일종이다. 홍콩산이며 올리브영에서 작년 혹은 재작년에 판매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살리실산(BHA) 성분이 일정 정도 이상 든 화장품이 한국에서 판매 금지되어 속상했었는데 더 효과 빠른 백화유가 나와 걱정은 조금 덜었다. 전달 속도가 빠른 것은 메틸의 영향인데 이 때문에 조금 어지럽거나 얼얼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전극 녹이는 효과가 좋은 걸(그래서 근육통과 두통 각종 답답함 등에도 좋은 걸) 아는데도 많이 쓰지는 못했다. 피해로부터 벗어날수록 얼얼함은 줄고 시원한 효과는 훨씬 산뜻하게 느껴진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내가 지금 뭔 소리를 늘어놓나 싶다. 나도 체계적이고 합목적적인 서술을 하고 싶다. 하지만 마인드컨트롤 피해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할 수 있겠나. 과거와 달리 나는 피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저 의무의 차원에서 언젠간(아마 몸이 다 나으면)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상이고 극소수의 피해자들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곧 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사람에게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질투도 없고 단지 언제든 나를 후회 어린 슬픔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동정만이 남았다.
저번 주 토요일에 오랜만에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도 말한 거지만, 이것에 대해 많이 알게 될수록 일반인이 이해 가능한 설명과는 멀어지고 만다. 논리적인 설명이 더이상 의미가 없고 괴상하게만 들릴 비약이 가장 첨예한 고민의 격전지가 된다. 실제로 그런가, 아닌가가 아니라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내게 의미를 지닌다. 피해를 인지하고 한동안 나는 이것을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로 가공해 누구에게든 들려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정신과의사들의 무지와 무책임에 대항하기 위해 항정신병 약물의 기전과 신경전달물질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이 있다. 그러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당분간 말을 아끼려 한다. 나는 항정신병 약물이 상태를 악화시키면 악화시켰지 전혀 회복에 도움이 안 되는 사기임을 안다. 약물은 소위 '조현병 살인'의 가장 큰 원인이다. 나도 걱정스러운 것이 이제 와서 약물 처방을 멈춘다고 그 사람들이 원상태로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라도 자신이 명백히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약물의 과량 복용과 입원을 강요받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단절시키는 사람들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이라는 인식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삶의 어느 지점에선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 사람들, 오래 가져왔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 대단하며 인간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관성이 '자기다움'이라면 그것은 편협할 뿐더러 끊임없이 학습하고 적응하는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않다. 일관성의 근거는 당연히 선이어야만 한다. 물론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생각은 일생 전체에서 개인이 합리화해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피해가 시작되기 전에 나는 누구에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의 가해자들은 처음에 '우리는 옳아'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말을 바꿨다. '우리는 옳지 않아. 우리는 너를 미치게 만들려고 했어.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건, 너는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나는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아무도 나의 무능을 질타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 다시 유능해지도록 악착같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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