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불안/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
미지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시체는 세 구, 범인도 셋. 며칠의 시간차가 있다. 그러나 모두 목이 x자로 베어진 채다. 무엇을 대입해야 아귀가 맞아 들어갈지 알 수 없는 그 x앞에서 형사 다카베는 당황한다. 우연일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인 정신과 의사 사쿠마에게 자문을 구한다.
<큐어>의 도입부를 요약한다면 이 정도의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틱한 사건을 묘사하는 화면은 몹시 침착하다. 젊은 여자가 동화책을 읽으며 의사와 상담하는 첫 쇼트 이후, 터널을 지나 걷는 한 남자, 동침한 여자를 파이프로 내리치는 그, 그가 샤워하는 동안 흰 커튼 위에 튀어 흘러내린 피를 담아내는 일련의 장면들이 경쾌한 음악과 함께 흘러가듯 이어진다. 관객이 어안이 벙벙해질 때 쯤 등장한 수사팀이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사라진 범인은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보통 놈이 아닐 거란 기대와 달리 범인은 소심하고 겁 많은 남자였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굳이 목과 가슴께를 x자로 잘라냈던 이유는 뭘까?
새로운 미스테리를 추적하면서 영화는 이제 형사 다카베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그는 공개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목을 x자로 베어 놓은 세 건의 살인 중, 검거된 각각의 범인들에게서 정신적 문제가 발견된 경우는 없었다 한다. 한편 첫 쇼트의 여자에 대한 정보도 제공되는데, 그녀는 정신질환을 앓는 다카베의 아내로 사쿠마가 소개해 준 병원에 다니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의사 앞에서 읽던 동화 ‘푸른 수염’은 남편을 죽이는 아내의 이야기다. 이것이 하나의 복선일 수 있을까? 극 중 다카베와 아내를 함께 비추는 장면들은 거듭될수록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범죄와 싸우는 형사이지만 그 역시 말 못할 갈등요소를 안고 있기에, 우리는 그를 알기 쉬운 영웅으로 환원할 수 없다.
기억을 상실한 청년 마미야의 등장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해변에 앉아있는 남자를 향해오는 그의 느린 걸음은 별다른 조정 없이 그대로 잡힌 잡음 속에서 유독 도드라진다. 그만의 박자를 고수한 채 마미야는 묻는다. -너는 무엇이지? 네 이야기를 들려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던 걸까. 마미야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살인자가 된다. x자의 칼질이라는 기괴한 수법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각각의 살인 장면을 충격적으로 가공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칼을 들이대는 순간의 인물들에게선 어떤 정념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껏 내려앉은 채도 속에서 표백된 인물들의 행동은 공허하게만 보인다. 각각의 쇼트들은 그 시간 안에 붙박인 것 같고, 유기적이지 않게 뚝뚝 끊긴다. 전반적으로 정적인 장면의 배치 사이에서 더 많은 필름이 그저 걸어가는 인물들을 따라가는 데 할애된다. 여기서 의도적으로 강조된 시간의 흐름 탓에 실제 시간이 얼마나 경과되었는지는 잊히기 쉽다. 하필 마미야가 기억 상실증인 것도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몰아넣는 데 한 몫 한다. 자신에 대한 것을 모두 비워버렸다는 그에게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가. 아무리 취조를 해도 그는 딴청만 부린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변인을 죽이는 것은 우선 마미야의 최면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면으로 사람의 기본적인 윤리관마저 바꿀 수는 없다고 한다. 최면술사가 불러내는 것은 개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이다. 애써 구석으로 몰아넣어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 외부와 접촉하지 못한 채 오롯이 혼자만 떠안은 사연들 말이다. 누구나 이런 ‘고립된 불안’들을 갖고 있기에 화면은 그처럼 이어지지 않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이어보려 사람들은 그토록 열심히 걷고 뛰어다녔던 것 아닐까.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상처를 너 자신의 칼로 직접 치료하라고, 낯선 이가 말한다. 온갖 취조만 있을 뿐, 사적인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적은 사회에서 그의 ‘이념’은 위력적이다. 그런데 설득력과는 별개로 이 이념은 사상누각을 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까웠던 사람에게 분노를 분출함으로써 ‘진짜 자신’을 발견해내라고 하지만, 타인들 속에서 구성되지 않는 자신의 원형이란 것이 정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감독은 옴진리교의 지하철 독가스 살포 사건에서 영감을 받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신흥종교란 외부사회를 모두 부정한 채 배타적인 공동체 안으로 침잠하는 개인들의 결사체다.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신흥종교에 빠져드는 데는 큰 이유가 없다. 어디 가서 절대 꺼내놓을 수 없는 불안이 받아들여질 때 찾아드는 최면 같은 순간, 그들은 잠시 마음을 놓아버렸을 거다. 그러나 치유를 위해 목표해야 하는 것은 조율이지 어떤 절대성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 신이든, 자기 자신이든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해 불가능한 타인들과 엉켜 살 수밖에 없다.
마미야와 대화한 다른 사람들에 비해 다카베는 오래 버틴다. 수감된 병원을 탈출한 마미야와 외딴 창고에서 단둘이 마주쳤을 때 그는 흔들림 없이 총을 겨눈다. 그러나 한두 발로 끝나지 않는 총성은 그 자체로 다카베의 불안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살인은 멈추지 않고, 형사는 평소처럼 식당에 앉아 밥을 먹는다. 마침내 불안을 베어낸 그의 행로가 궁금하다. 치유의 ‘이념’은 앞으로 몇 사람의 몸을 더 타고 넘을 것인가. 선과 악의 경계는 공고해보이지만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간단히 뒤바뀔 수도 있다. 낯선 이를 친절하게 맞아주고, 남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듣는 것. 이렇게 호의처럼 보이던 것이 나중에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것이 이 영화를 무섭게 했던 최대의 원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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