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영화에서 이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일까? <자객 섭은낭>은 하늘의 법도와 인간의 윤리를 대비시키며 그 사이에서 중력의 법칙을 거스른 채 무공을 펼치는 자객의 모습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여준다. 흔히 협객을 국가 혹은 법에 맞서 싸우는 자유인으로 보기 쉬우나 <자객 섭은낭>의 여도사는 무정한 검으로 표상되는 법의 비인격성을 따른다. 그녀는 죄를 범했거나 도리를 어긴 자를 가차 없이 지목한다. 반면 그녀의 제자 섭은낭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데 바쁘다. 기척을 숨기고 목표물에 접근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무표정한 얼굴을 드러내고 인간사에 개입해 자신의 등장을 알린다. 은낭이 안개 속에 몸을 묻지 못하고 인간의 마을로 돌아오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인물들이 직접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드문 이 영화에서 마음의 흔들림은 주로 주변 사물들과 자연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정적인 화면 안에서 불의 일렁임과 퍼져가는 김과 연기, 안개와 바람의 움직임은 유독 도드라진다. 자연을 멀찍이서 담은 쇼트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와 벌레의 소리는 다른 감각을 압도하며 현실감을 일깨운다. 때때로 여기에 빠른 박자의 반복적인 악기 소리가 얹히면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된다. 한편 이 영화에서 사건은 주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시간차를 두는 방식으로 전달된다. 타인의 소식을 말하고 듣는 이들은 지그시 표정을 누르고 자신이 한 일을 되새긴다. 어떤 사건은 관점을 바꾸어 거듭 전달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거리는 본질적으로 카메라가 나타내는 거리와도 같은 기능을 한다. 응시의 대상은 화면 밖으로 넘치고, 조망한 인물들은 풍경 안으로 사라진다. 이러한 빛과 소리의 바탕은 결코 꽉 채워지지는 않는다. 틈새를 밀고 들어와 느닷없이 펼쳐지는 대결 장면이야말로 허우 샤오시엔이 연출해내는 무협영화의 백미다. 많은 대결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고 끝나기 때문에 소리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음향을 강조한 연출은 자객의 입장에 가능한 한 접근하려는 감독의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자객 섭은낭>은 이주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은낭은 위박의 후계자인 전계안과의 혼약이 깨진 후 산으로 피신해 여도사 가성공주의 제자가 되며, 임무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어릴 적 친구인 거울 닦는 소년을 만나 신라로 떠난다. 가성공주의 쌍둥이 자매인 가신공주는 조정과의 화친을 위해 위박에 정략결혼을 온다. 은낭과 계안의 혼약은 유민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지사의 딸과의 혼담 때문에 깨지고, 극중에서 계안의 심기를 거스른 은낭의 외삼촌 전흥은 지방으로 좌천돼 죽을 위기를 겪는다. 장소 이동은 곧 자신을 드러내거나 숨기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자객인 은낭이 암살 대상자인 계안에게 예외적으로 정체를 밝히는 것은 과거의 약조에 대한 회답을 받아내려는 시도 같기도 하지만, 더 이상 지난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징표인 한 쌍의 옥패는 이제 은낭의 손을 떠난 것이다. 쌍둥이였던 가신공주와 가성공주가 각기 천도와 인륜을 나누어 수행하듯, 계안의 본처인 전원씨가 안채의 모략가이자 가면을 쓴 여도사로서 자신을 분할하듯, 은낭과 계안이 속한 세계는 갈라져버렸다.


거울이라는 사물은 이렇게 따로 떨어져 나온 인물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매체다. 흑백의 회상 장면 후 바로 나오는 것은 거울을 보고 단장하는 은낭의 어머니이며 후에 같은 행위를 전원씨가 반복한다. 둘은 앞으로 자신이 할 일과 책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가성공주에게 거울은 외로움의 상징물이다. 그녀는 이주해온 자신의 처지를 홀로 갇힌 금조의 처지에 비기며 울지 않던 금조가 거울을 본 후 밤새워 울고 춤추다 죽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금조는 오로지 동족이 있을 때에만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은낭은 가성공주로부터 들은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전하며 그녀의 고독을 드러낸다. 거울 닦는 소년의 존재는 가장 상징적이다. 시골마을에서 그는 아직 자신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내 거울을 보여주고 경탄을 산다. ‘거울을 가진 그는 은낭이 지킨 약속에 비추어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까지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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