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에세이 (5/7) 해석인류학: 클리포드 기어츠

 

문학과 문화연구를 전공하던 내가 인류학 공부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이유로 든 말들이 몇 있었는데, 미디어로 재현된 문화가 아닌 실제 사람들의 관점을 만나고 싶다, 문화를 일종의 텍스트로 보고 현지조사에 임하려 한다, 인류학은 인문학에 가깝다고 본다, 같은 것들이었다. 클리포드 기어츠가 이러한 생각들을 인류학계에 정착시킨 선각자였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문화의 해석> 서문을 읽고는 반가우면서도 당혹스런 마음이 들었다. 행위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짚어낸 후 문화의 완전한 파악은 불가능할 거라 마무리 짓는, 그럼에도 분석의 정교화를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할 것을 당부하는 기어츠의 서술이 지나치게 문학적이어서였을까. 그는 이 상황의 막막함을 말하기 위해 인도설화의 비유마저 빌려온다. 세계는 단상 위에 있고, 단상은 코끼리 위에, 코끼리는 거북 위에 있으며 그 아래로는 다시 수없이 많은 거북들의 연속이리라는 것. 문화의 다양한 층위를 파고 내려가려면 이처럼 알 수 없는 지반 위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기어츠가 길버트 라일의 개념을 따 민족지(ethnography) 기술의 요건으로 들고 있는 중층기술(thick description)’, 표면에 드러난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 동기와 사회 문화적 맥락을 다각도로 짚어내는 입체적인 서술을 말한다. 이는 현상기술(thin description)’의 단편성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탐구의 결과물이다. 인류학자는 완전한 내부자가 되어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하는 것도, 외부자로서 방관인의 시점만을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둘 사이를 오가는 관점의 전환은 현장에서 활자 위로, 집단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관심의 초점을 바꾸는 작업과정의 여정과도 유사하다. 기어츠는 문화 분석에서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하려 하거나 자연을 일종의 실험실로 간주하는 입장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문화를 개개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의식으로만 보는 입장에도 반대한다. 철학을 공부하다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을 느껴 인류학에 발을 들였다는 궤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문화를 일종의 공적 영역으로 보며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에서 문화를 발견하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지는 미시적이다. 인류학자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작은 문제를 가능한 한 넓게 해석하려 함으로써 통로를 발견하고 한 문화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으로 나아가게 된다.

 

 

연구의 위치가 곧 연구의 대상은 아니다. 인류학자들은 촌락(혹은 부족, 소도시, 근린집단......)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촌락에서 연구한다. 당신은 다른 것들을 다른 곳에서 연구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문제, 예를 들면 도덕적 기대의 틀을 확립하기 위해서 식민지배 체제가 어떤 일들을 행했는가 같은 문제는 특정의 제한된 지역에서 가장 잘 연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로써 그 장소가 곧 당신이 연구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클리포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37.)

 

 

민족지학자/인류학자는 어느 민족 집단을 연구하는 이라기보다는 어느 민족 집단에서 보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이라는 말이 몹시 와 닿았다. 인류학자가 쫓는 주제는 현지에 가면 즉각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지에 가기 전 그동안 살아온 경험이나 관심사, 독서량 등을 단단히 비축해둘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상상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타자의 다양성에 놀라 주요한 사실들을 지나치거나, 자기 사고 속에서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그를 왜곡할 수도 있으니까. 인류학자에게는 어느 민족 집단을 연구할지 결정하고 현지조사의 계획을 짜는 단계에서부터 연구의 시작이다. 그리고 시작과 끝은 종이 위에서 (혹은 LCD 모니터 위에서?) 만나 협상을 시작하고 서로의 책임을 묻는다. 글로 써진 내용이 불분명하다면 우선적으로 현지 조사의 문제일 수 있지만 어쩌면 현지 조사한 내용을 결과로 풀어낼 만한 해석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어츠가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에서 저자로서의 자의식이 가장 강하다고 분석한 레비스트로스는 현지조사 후 <슬픈 열대>를 쓰기 위해 매우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지체했다고 한다. 저술을 위한 내적 갈등을 서슴없이 밝히는 것은 물론 현지조사를 나가기까지 자신의 근황을 시시콜콜 적어두는 <슬픈 열대>의 초반부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에세이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슬픈 열대>라는 저서가 현대문명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냉소적 시선이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 등을 중심으로 직조된 글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처럼 자기 기술적인 내용들은 불필요한 잉여가 아니라 글 전반의 모티프를 암시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읽힐 수 있다. 제리 무어와 앨런 바너드 등 인류학사를 총괄하는 개론서를 쓴 저자들은 <슬픈 열대>를 레비스트로스의 저서 중 비교적 쉽게 읽히는 책, 혹은 자서전적 경향의 여행기로만 보고 다른 이론적인 구조주의저서들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기어츠는 <슬픈 열대>야말로 이후 레비스트로스의 저서들이 나아갈 방향들을 일러주는 나침반과도 같은 저서라고 재평가했다. 말리노프스키의 발표된 저서들보다도 사후 발견된 <일기>에서 방황하는 폴란드인을 읽어내는 기어츠의 분석 역시도 비슷한 방향을 택한다. 그것은 민족지가 연구자의 자아에 침윤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주관성을 철저히 인식하고 여기서부터 외부로 향하는 연구의 가닥을 잡아가자고 제안하는 해석이다.

 

이미 써진 글들을 필요에 따라 수집, 절취하고 재평가하는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아래서 크게 각광받아온 방식이다.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를 읽으며 기어츠가 고전적인 인류학자들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방식과, 민족지를 대하는 새로운 관점에 놀랐지만 정작 그의 현지조사에 대해선 아주 적은 분량만을 읽었을 뿐이다. 나는 아래 인용한 서문의 일부에서 기어츠의 민족지를 짐작해본다. 말하기 전에 먼저 듣고, 모두와 떨어진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그날 발견한 것들을 되새겨보는 그의 시간을.

 

 

따라서 민족지 기술은 다음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 첫째로, 그것은 해석적이며, 둘째로 그것이 해석하는 것은 사회적 대화의 흐름이며, 셋째로 여기서 해석이란 그러한 대화가 소멸되어버리지 않도록 그중 말해진 부분을 구출하여, 해독 가능한 형태로 고정시키는 것을 말한다. (클리포드 기어츠, <문화의 해석>, 35.)

 

 

연세대 문화인류학과에서 수업을 들으며, 한국 인류학에서 가장 우대받아온 (마치 인류학의 전부인 것 마냥) 개념이 라포자기 성찰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중 전자는 타자를 대하는 방식을, 후자는 자아를 대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민족지를 자아와 타자 사이에 걸쳐진 문제로 보는 기어츠의 관점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둘이 각자로 떨어져 있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 연결의 방향이 일방적이라면, 민족지를 쓰는 과정은 지나치게 단조로운 감화나 침잠의 과정으로 빠져버리지 않을까. 이러한 감화와 침잠은 도덕적인 자세로 매듭을 맺기 쉽다. 나의 치부를 들춰보고 타자를 잣대 삼아 그에 편입되거나, 그렇게 편입될 수 없는 자아를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것. (문학가라면 완강한 거부가 더 흔하겠지만, 아무래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도덕을 보는 관점에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그중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선악 규범이다. 나는 인류학자, 아니 모든 종류의 학자라면 이런 안전한 규범의 자리 안에 머무르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곧장 자기 문화권, 혹은 현대인 모두의 문제로 확장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서투를지라도 의문을 던져야 하고 그 의문이 타당한지 검토하기 위해 세계와의 접촉을 게을리 말아야 한다.


2012년 현대문화인류학이론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은 포스트모던한 현대 인류학의 경향이 지나치게 자아 탐구에 치중해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최근에는 다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주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현대의 사회경제적인 기반이 어떻게 이 시대의 도덕을, 시대정신을 만들어왔는지 분석하는 것이 인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어츠의 입장을 따르자면 그 분석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서, /녀와의 대화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관찰하는 자의 낯 색을 화사히 바꿔줄 둔갑술에 좀 더 익숙해진다면 좋으련만. 나는 늘 이걸 의식적으로한다. 의식하는 연기는 필연적으로 어설프다. 나는 지금 타자의 경험을 착취하고 있는가? 이 질문으로부터 한쪽 발을 빼는 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제가 인터뷰 보수를 드린다는 말을 미리 해도 됩니까? 이런 말은 교수님께 직접 여쭤본 적도 있다. (‘원시문화를 연구하던 선학자들이 대가를 미끼로 현지인들과 가까워지는 걸 당연시했다는 것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글의 윤리와 연구 방법의 윤리가 늘 함께 갈 수 있는가. 나는 앞서 학자가 도덕적 규범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글의 윤리에 관해서라면 제법 그럴싸한 말을 더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연구 윤리에 관해서라면, 나 역시 누군가가 딱 선을 그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 답은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채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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