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내내 배고픈 감각을 곱씹고 있다. 집에는 특별히 먹을 것이 없고 조리를 하기엔 힘이 없다. 이틀 연속 볶음진짬뽕을 먹고 염분을 보충했다. 덕분에 더이상 짠것을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볶음진짬뽕 봉지라면 품귀현상은 나만 느끼는 것인지 인터넷에는 멀쩡히 매물이 올라와 있다. 대신 산 컵라면은 면이 흐물거려 실망스러웠다. 짠것 다음에는 단것일까? 특별히 맛이 끌리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단맛은 생산성과 직결된다는 기분을 준다. 오면서 생산적인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으로 쿠키를 사먹었다. 시시콜콜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저번주에는 꽤 성실한 기분도 누렸다. 하지만 이번주에는 몸 곳곳이 아프고 가슴이 눌려 호흡곤란으로 잠드는 일이 잦았다. 화요일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붕 뜬 스케줄을 붙잡고 일곱시 반의 영화를 보았으나 기대와 달리 납득하기 어려운 영화였다. 얀 슈반크마예르는 고등학생 때의 '존잘님'이었지만 (이 표현은 문자로 옮기려니 매우 시대착오적으로 우습다.) 시각적 효과 외에 내용 측면에선 퍽 투박한 것 같다. 그날 본 <오테사넥>은 부천영화제에서 상영하기에 걸맞아보이는 B급영화의 월드시네마 버전이었다. 그러나 자막은 전주영화제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고전 중 처음에 본 <살아남은 삶>은 특히 지루했다. 프로이트를 제대로 곱씹지도, 놀리지도 못하면서 어설픈 경의를 보내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외에 시각적 효과에 능하지만 극화에 서툰 감독으로는 길예르모 델 토로가 있다. 그의 최근작 <크림슨 피크>는 캐스팅이 아까울 정도로 연기의 설득력을 뽑아내지 못한 졸작이었다. (물론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팬들도 많이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은 편안하지만 특별할 것은 없는 일이다. 며칠 만에 다시 아트시네마에 갔다. 어제는 <장미의 행렬>을, 오늘은 <붉은 대기>를 봤다. 두 영화의 감독 간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는 어제 영화 후의 강연에서 들은 것이다. <붉은 대기>의 감독인 크리스 마르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모든 작품에 천연덕스럽게 고양이(추가적으로 올빼미)를 우겨넣는 점이 매력포인트라 할 수 있다. <붉은 대기>의 영제는 A Grin without a Cat 이었는데 한국어 번역제는 꽤 심심하게 되었다. 혁명의 열기를 다룬 영화이기에 그렇게 정했겠지만 원제 없이는 아무래도 대미를 장식하는 '고양이 숭배 행렬' 장면이 뜬금없이 요란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화자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며 고양이 숭배 행사 영상을 붙였는지 경위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의 경우 머리를 긁는 일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더구나 자리가 없어서 맨앞에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영화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역사문제연구소라는 곳에서 단체 행사 겸으로 대관을 한 것이라 관계자 관객이 많았다. 영화 상영 전에 잠시 크리스 마르케의 북한 사진집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저고리를 치마 안으로 넣어 입은 사진이 신경쓰였다. 생활한복을 일본의 하카마와 닮았다고 공격한 기사에서 치마 안에 저고리를 넣어 입은 모양을 주로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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