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추워질 것이고

quarry 2017. 8. 29. 03:09

슬리브리스를 입고 어깨에 쬐는 볕과 동시에 바람을 느끼는 것이 좋다고 쓸 일도 더 없게 되었다. 뭐 괜찮다. 슬리브리스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슬리브리스가 잘 어울리니 많이 입으란 말을 들었고 그래서 산 면-마 소재의 흐린 감색 크롭 슬리브리스는 아주 잘 입었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는 새삼스레 여름용 와이드팬츠를 사서 삼일 잘 입었다. 한때 신의 소재라 찬양하고 싶기까지 했던 면-마(1:1 비율에 가까운) 소재로 알고 주문했으나 실제 태그에는 면, 마, 폴리가 30퍼센트씩에 레이온이 나머지 비율을 채운 소재로 적혀있어 실망스러웠다. 가격이 쌌기에 후회하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싼 게 비지떡'이란 식의 말을 몇 번 들었다. 그 바지를 입고, 버쉬카에서 산 xs사이즈의 검은색 브라렛에 손수건 모양의 끈나시(이것은 2009년 경에 유명 구제숍에서 구입했으나 한번도 밖에 입고 나가지 못한 옷이다.)를 겹쳐 입었다가 엄마한테 혼났다. 가슴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전체적인 조화가 잘 맞는 것은 보지 않는 건가? 엄마는 늘 자기가 사준 옷만을 봐줄 만 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어떤 옷이 자기가 사준 것이었는지를 까먹기도 하지만. 그리고 나는 사고 싶은 옷이 있다. 그것은 29일에 재입고된다. 여러가지 곤란함이 있으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두운 톤의 단순하고 긴 옷은 언제나 나의 무의식적인 취향을 자극한다.

30일 점심에 h를 만나기로 했다. 그를 영화관에서 만난 일을 깜박 잊고 쓰지 않았었다. 실은 아직 확인문자를 받지 못했다. 내일 정오까지 오지 않으면 먼저 보낼 것이다. 오늘은 문자에 답하는 것이 귀찮았다. 피해자들이 안부를 물어왔지만 늦게서야 응했다. 포켓파이를 충전하지 못해 인터넷을 쓸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공연의 출연자로부터 감사 문자를 받았는데 생각 끝에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연극에 박한 평가를 한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어제 일이다. 어제 생리가 시작되어 몹시 아팠다. 낮시간을 거의 통째로 날려버리고 여섯 시 반의 다큐멘터리를 보려 기다렸다. 올리브가 들어간 바릴라의 토마토소스로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었다. 재료가 좋았기 때문에 저번에 언 토마토를 넣고 만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절인 올리브가 들어간 소스라 좀 짰는데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짠것이 몸에 잘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동생은 그것도 덜 짜고 올리브 기름 맛이 너무 난다며 소금을 더 넣어 만들겠다고 했다. 정작 그가 나중에 만든 파스타는 그리 간이 세지 않았다. 동생이 맥주를 사온대서 내 몫도 부탁하고 다큐멘터리를 틀어놓은 채 마셨다.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에선 올리브 기름과 유사한 풍미가 느껴졌다. 짠 올리브와 먹었다면 그럴싸했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냥 마시기엔 맛이 없었다. 보려던 프로그램은 EBS에서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일환으로 방영하는 <바그다드에서 온 편지>였다.

<바그다드에서 온 편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동지역을 탐사한 거트루드 벨이라는 영국 여성의 편지를 주변인들의 증언과 함께 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여성 감독 두 명이 편집했으며 틸다 스윈튼이 제작에 참여하고 나레이션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거트루드 벨이라는 이름은 아주 달콤하게 들렸지만 인용된 편지들은 퍽 무미건조했다. 철강 사업가의 딸로 어릴 때 친어머니를 잃었으며 옥스포드에서 역사학 최우등 성적을 받은 그는 편지에서 시종일관 아버지에게 큰 애착을 느끼는 철부지 소녀처럼 굴었다. 거트루드 벨이 영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인물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편지는 그를 재현하기에 그리 풍부한 텍스트가 아닌 듯 한데, 거트루드 벨이 쓴 책이나 정부에 참여한 문서 등은 영상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트루드 벨을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사적인 인상만으로도 만족스러웠겠지만 나로서는 인물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어떤 인물의 진정한 모습, 핵심적 사안은 공적인 업적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영상 도입부에 "내가 큰 일보다는 작은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편지 구절을 부러 강조한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물론 계속되는 답사는 따분함 속에서 버티는 일들의 연속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왜 대체 여자들이란 자기가 하는 일에 스스로 중요성을 부여하기를 그렇게도 꺼린단 말인가?

근래 생산성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고 또 자주 내가 하찮고 보잘것없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중요한 일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물리칠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다. 레베카 솔닛은 최근의 내한 강연에서 글 쓰는 여자를 위한 조언으로 "사적인 것을 쓰라는 요구를 많이 받겠지만 그 이상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가 경험한 것으로 치환하라는 말,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부딪힐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려고 한다. 레베카 솔닛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직위와 상관없이 공적인 과업에 헌신하려는 여성들을 좋아한다. 파도손의 이대표는 내가 아는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힘들었으나 늦게나마 나갈 채비를 하고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열리는 국제포럼에 갔다. 이대표를 볼까 기대했는데 내일 워크숍에만 참여하고 포럼에는 안 온 것 같았다. 일본 정신과의의 마지막 발표밖에 듣지 못했지만 자료집의 내용이 꽤 튼실했다. 동시통역기구로 통역이 진행되었는데 매우 깔끔하여 놀랐다. 전에 광화문 근방에서 누군가의 강연을 들었을 때 제공된 동시통역은 매우 부실했던 데다가 기계도 자꾸 잡음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테리 이글턴이었는지, 데이비드 하비였는지, 또다른 누구였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차라리 영어를 듣는 게 낫겠다고 동시통역기구를 벗어버렸던 기억만 생생하다. 

이번 포럼의 후원자는 후견인제도에 관련된 일을 하는 단체였는데 그래서인지 생소한 '의사결정능력 장애'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한편 자료집에는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라는 말이 모두 쓰였다. 공식적인 법적 용어를 사용하려는 법-행정학자들의 경향과 지역사회 통합을 강조하는 사회복지학자들의 경향이 혼재했던 것 같다. 예외적으로 내가 발표를 들은 일본의 정신과의는 매우 장애 친화적이었고 일본인 특유의 소탈함을 보여 호감을 샀다. 호주의 정신과의도 참여했지만 그의 입장은 알 수 없었다. 한국의 정신과의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포럼의 주최자는 보건복지부였다. 법적인 심사의 적합성 여부가 주된 내용이었으나 '사회통합'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내용에 대한 논평은 자료집을 찬찬히 읽고 나중에 해야 할 것 같다. 국립정신건강센터에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넓고 깔끔했고 많은 치료 관련 프로그램을 광고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중증 정신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몇 명 보았는데 가끔 길에서 마주치는 비인지 피해자들보다 상태가 안 좋아보였다. 인천에서 본 노숙자 수준이랄까. 약을 먹으면 상태가 악화되며 증상을 통제할수 없게 된다는 추정에 심증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는 종종 한국의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자면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그들은 좀 더 겸허해져야만 한다. 그때까지 나는 이 오만함을 좀 더 붙들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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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밀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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